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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밈 Apr 09. 2019

벼랑 끝 선택한 공시

취업실패자의 최후의 보루

때는 바야흐로 2015년 1월 1일.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사람들이 왜 보험을 드는지 아니?
불안하니까 드는 거야."

 

새해 첫날부터 웬 보험 이야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된 계기.


당시 나는 공기업과 은행 취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일 자소서를 쓰고 또 쓰고 채용설명회 때 현직자들에게서 자소서 첨삭을 받고 면접캠프에 참가하고 필기 공부를 하고 아르바이트와 봉사활동을 하고. 그렇게 취업준비를 하였는데 은행이나 사기업은 대부분 서류에서 탈락하였고 공기업은 서류는 통과해도 필기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그렇게 미루고 미룬 졸업식을 코앞에 둔 순간까지도 나는 1승을 거두지 못하였다.


"취업이 어려우니 보험 삼아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어떻겠니?
일단 놀기 삼아 시험이라도 한 번 쳐봐. 나중에 안 하더라도.

당당히 취업하지 못한 나는 아버지 말씀에 무기력하게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졸업까지 했으니 주위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뒤처진다'라는 말이 참 슬프고 무섭다. 학생 때는 다 같은 처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졸업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느낀다.


마침 아버지 말씀이 끝난 직후, 친구로부터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우리 같이 공무원 시험 준비할래?" 아아, 진정 공무원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신의 계시인가?!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고3으로 돌아가 집 앞 독서실을 다니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였다.


고등학생 때, 나의 가장 'Hater'는 '공무원'이었다. 그토록 싫어하던 공무원이었는데!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셔서 공무원의 성향과 월급이 어떠한지 아주 자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공무원이 되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있으니 무력감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정말이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공부를 하는 중간중간에 친구 한 명은 어느 회사 인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공시 같이 준비하자던 친구는 나한테 미안하다며 자기는 해외 인턴 하러 떠난다는 소식도 들었다. (으응? 네가 같이 하자며!! 이 배신감 무엇!) 공부를 하면서도 공기업 채용공고를 기웃기웃거렸지만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오기를 가지고 더 열심히 준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1월부터 약 3개월간 죽도록 공부한 끝에, 4월 초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건 합격수기가 아니니 공부방법이나 시험과목 등에 대한 이야기는 패스한다. 합격한 순간은 좋았지만 연수일 직전까지도 나는 공기업 인턴 면접을 보러 다니고, 서류 지원을 하였다.



어렸을 때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잡지 『생각쟁이』를 구독하며 유학을 가서 경영 컨설턴트가 되는 것, 유명한 광고인이 되는 것을 꿈꿨다.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토토의 눈물』, 『토토의 새로운 세상』을 읽으며 유니세프에서 일하는 나를 상상하였다. MBC 다큐멘터리『아마존의 눈물』, 『북극의 눈물』을 보며 다큐멘터리 PD가 되길 원하였다. 환경 NIE 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하며 환경 NGO에서 일하고 싶었다.


결국,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씩 다 관심 있는 일이었고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렇게 대학교에서도 방황을 하며, 내 미래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 결과 나는 가장 되고 싶지 않았던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방황의 끝, 취업 실패의 끝에서 나는 공무원이 되어버렸다. 자의든 타의든 내가 그 길을 선택하였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었다.


그토록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나는 아이러니하게 그 일들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포도밭의 여우처럼 '그 일을 하면 힘들 거야, 월급을 적게 받아서 오래 하지 못할 거야' 애써 생각하며,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을 제쳐두고 굳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방황하고 있다.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안정적으로 살아지는 것을 택한 꼴이 돼버렸다. 그토록 혐오하던 사람이 결국 돼버렸다. 내가 그렇게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공무원 시험 합격하면 그걸로 길고 긴 공시 인생, 취준 인생 다 끝인가요?


우리가 대학만 합격하면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놀고 싶은 것 다 놀며 핑크빛 청춘만 가득할 줄 알았지만. 사실 그 핑크빛 시간들은 얼마 안 가 신기루처럼 다 사라졌다.곧이어 미래에 대한 지독한 고민과 지겨운 취업준비를 하러 깜깜한 동굴 속으로 들어갔지.


이제 그런 눈가리개는 더 이상 소용없다. 공무원이 되었더라도 취업이 되었더라도 각자 나름의, 한 차원 더 깊어진 고민과 걱정거리가 생긴다.


그럼 여기서.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걸로 끝! 하고 의식 없는 좀비처럼 길고 얇은 줄 위를 한 평생 조심조심 걸어가야 하나? 아니면 깨어있는 '나'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대로 줄을 타며 뛰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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