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클럽과 밤의 기억

스페인 10박 12일- 직장인 혼자 여행

by 미니밈

|바르셀로나 4박 5일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그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도, 양이 푸짐한 해산물 빠에야도, 피크닉 돗자리 위에 누워 한가로이 보낸 시간도 아닌, 그날 밤의 재즈클럽과 그 다음날 밤 해변에서 와인을 마시며 처음 만난 여행자들과 낄낄거렸던 시간이다.



|바르셀로나 재즈클럽


스페인 여행을 가기 전 가이드북을 한 권 샀는데 재즈클럽 추천 페이지에 눈이 갔다. 미로 같은 어두운 길을 골목골목 지나면 어느 작은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는 소규모 재즈클럽! 초행자는 찾아가기 어려울 거라고 적혀 있었다. 매일 밤 공연이 열리는데 요일마다 잼 세션, 스탠딩 라틴음악파티, 플라멩코 공연, 재즈 거장 무대 등 다른 컨셉의 공연이 열린다고 하였다. 오! 음악과 맥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스페인의 낭만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곳이지 않을까?!


그렇게 여행자 몇 명과 함께 어두운 골목을 헤치며 찾아간 그곳은 정말로 작은 재즈 클럽이었다. 왼쪽에는 맥주나 간단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카운터가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작은 무대 앞 어두운 조명 아래 세네 줄 정도의 의자가 줄지어 놓여있었다. 2층에도 작지만 공연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자유롭고 비밀스러운 재즈 클럽 공간의 느낌을 한껏 살려주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곳에 위치해서 우리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여행자들이 여럿 모여 공연장을 더욱 생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맥주 한 병씩 사서 설레는 마음을 한 모금 축였다. 그리고 음악이 흘렀다.



난생처음 제대로 보는 재즈 공연에 어마어마한 감동을 받았다. 잔잔한 기타 연주와 매력적인 목소리의 음률이 나를 설레게 했다. 이분들은 여기 작은 공연장 단 몇 명의 관람객들을 위하여 훌륭한 연주와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돈과 명예를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심취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와 좋구나, 스페인!


이런 재즈클럽이라면 매일매일 가고 싶었다. 값싼 맥주 한 병과 가슴을 적시는 노래와 깔끔한 기타 반주. 지친 하루를 위로하는 데 이거면 충분하였다.



|밤의 기억


그 다음날 밤, 재즈클럽의 여운을 안고 다시 모인 우리는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모여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슈퍼에서 싸구려 와인과 치즈, 감자칩과 맥주를 사 들고 와 돗자리 위에 깔았다. 지금 이 보다 더 근사한 안주가 또 있을까.



9월 말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바람이 제법 많이 불었다. 깜깜한 저녁이고 날씨도 꽤 차가워 바닷가에는 우리들과 담배 피우는 몇 명의 외국인들밖에 없었다.


그때, 한국인 여행객 한 분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셨다.


“자, 이제 약을 먹어볼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페트병에 담긴 소주였다. 이 낭만적인 바르셀로나 밤바다에서 소주라니! 우리는 낄낄거리며 술을 마셨고 어둑한 밤을 인생과 사랑,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득 빛냈다.


분명 어제오늘 처음 마주한 여행객들이었는데 우린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끊임없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웃었고, 때론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저 인생 한편을 스쳐 지나갈 사람들이겠지만 우리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보여주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사람이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모르는 사람은 고정관념 없이 나를 바라봐주기 때문에 그저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보여주면 되었다. 우린 그냥 여행자일 뿐이었고 굳이 잘 보일 필요도 뽐낼 필요도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바람이 더 거세어지자 우리는 짐을 챙겨 다시 언덕길을 올라 술집들이 즐비한 골목 쪽으로 올라갔다. 그 와중에 거센 바람에 비닐봉지가 날아가 허겁지겁 주으러 가는 A의 뒷모습과 돗자리를 연처럼 펄럭이며 들고 뛰어다니는 B, 키도 가장 큰데 술에 취해 휘청휘청 거리는 C의 모습까지. 그땐 그 사소한 것들이 왜 그렇게 웃기던지 깔깔깔 배를 잡고 웃었다. 흐트러진 모습에 자유를 느꼈다.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고 우리 또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사니즘에 지쳐있었는데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 그렇게 실컷 마시고 즐기고 웃으니, 20대 초반 자유로웠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지금 여기 한국에서는 또다시 미소를 잃어버렸는데 그때가 가끔 그립다. 그 시절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간 사람들과 그때의 자유로웠던 나 자신이. 그 시절 아름다웠던 밤의 기억이 너무 그립다. 바르셀로나에서 비로소 낭만과 자유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