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키도 잘못이 없다
아침 8시 20분. 등원과 출근 준비를 정신없이 마치고 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다 곧 한 층에서 멈췄다. 나는 170cm로 여자치고 제법 큰 키인데 나보다 10cm는 더 커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성큼 들어왔다.
그때, 만 3살 난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큰 거야?"
순진무구한 눈으로 악의 없이 내뱉은 아이의 말에 뜨악하였다. 혹여나 그분이 듣을세라 재빨리 엄한 눈빛으로 "조용! 조용히 해!"하고 다그쳤다. 아이는 굴하지 않고 계속 "엄마,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큰 거야? 엄마~"하고 말했다.
어쩌면 아이의 말을 이미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성을 등지고 서 있어서 과연 어떤 표정이었을까 잠깐 상상해 보았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져 그만두었다.
사실 지난번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아이와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이었고 중간에 어떤 여성이 탔다. 지금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엄마, 저 엄마는 왜 작아?
세상 무해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오싹 소름을 느끼며 다급하게 아이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빨래집게 집듯 잡았다.
그 여성이 제발 아이의 말을 듣지 못하였기를 간절히 바랐다.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아이는 엄마가 대답을 안 하니 계속 다시 말을 하려고 웅얼거렸다. 아이의 입술을 꼭 쥔 채 조용히 하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내려가는 몇 초의 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분은 아무 말 없이 1층에 내렸고 우리는 지하 2층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아이의 두 어깨를 붙잡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작다라고 하면 그 사람이 기분 나쁠 수 있어! 함부로 상대방 앞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말하면 안 돼!
그러자 아이가 나한테 말했다.
엄마, 나도 아기라서 작은데?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했다.
아이는 사람들의 외모를 평가하여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한 것이 아니다. 자기도 아기여서 키가 작기 때문에 '작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것일 뿐이다.
(참고로 실제로 그 여성이 눈에 띄게 작은 키는 아니었다. 내가 보통 여성보다 눈에 띄게 클 뿐...)
아이는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말한다. 어떤 여자의 키가 엄마보다 작으면 작다고 하고, 엄마보다 크면 크다고 한다. 키가 작거나 커서 '좋다, 나쁘다'의 뜻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작다, 크다' 표현한 거다. 게다가 요즘 한창 무엇이든 '왜?'를 붙여 질문하는 시기라서 이번에도 '왜'가 붙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고 잘 모른다 해도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하는 건 옳지 않다. 잘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사회규범과 예의범절은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아이의 잘못에 당황하고 난감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의뭉스럽게도 내가 속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 뿐 키가 큰 여성을 보았을 때 '와 키가 진짜 크다. 이 정도면 농구선수 급인데. 살면서 많이 주목을 받았겠다. 스스로 본인 키를 콤플렉스라고 여길까?' 하는 여러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오히려 순수하니까 보고 느끼는 대로 표현했고, 나는 속으로 한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평가하고,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미를 담아 편견 어린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봤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거침없고 솔직한 아이의 말에 뭔가 들킨 듯이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깜짝 놀라 더는 말하지 못하게 했지만 어쩌면 스스로 '작다, 크다'는 말에 의미 부여를 하고, 그 말은 나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형화된 기준에 박혀 생각과 판단을 하고, 그것을 숨기기에 급급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온전히 있는 그대로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먼저 나만의 편견과 시선 안에 그들을 가둬버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두 여성은 어쩌면 아이가 순진무구하게 내뱉은 말에 기분 나빠하기보다, 아이를 급하게 입막음하는 내 모습에 더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오늘은 엘리베이터에서 또 어떤 말을 할지 두렵지 않다.
오늘은 얼마나 더 다른 누군가를 고정관념 어린 시선으로 판단하였을지 깨닫게 될까 봐 두렵다.
한편, 아이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큰 건지 물어봤을 때 입을 막기보다 "우유와 채소를 많이 드셔서 그런가 보다~ 우리도 앞으로 우유랑 채소를 많이 먹자~"라고 했어야 했나 불쑥 생각이 든다.
쉽지 않은 육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