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겨울, 언니의 한마디가 나를 흔들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학교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공허함 사이에 놓여 있었다.
몸은 쉬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긴장돼 있었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두렵고 낯설었다.
조용한 집 안에서도 작은 소리 하나가 크게 울려 퍼지는 듯했고, 불안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눈을 뜨면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습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을 때면 계단 옆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한 번에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나무와 차, 그리고 사람들의 발자국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게 나를 붙잡아 준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시간은 베란다에 서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는 순간뿐이었다.
죽지 않을 만큼만 밥을 먹고, 다시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내 시계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문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계절은 변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봄이 오면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조여들었고 숨이 막혔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점점 사라질 것 같았다. ‘잘 살고 싶은 마음’과 ‘모든 걸 끝내고 싶은 마음’ 이번 갈아 밀려오며 하루하루를 뒤흔들었다.
그 두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며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를 버텼다. 그 시기, 매일 예민하고 날이 선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 건 가족뿐이었다. 가족도 말을 아꼈다. 내가 문을 잘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언니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왜? 무슨 일이야?”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가.”
언니는 문을 열고 들어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시사영어학원에서 영어캠프 한다는데, 한 번 가볼래?”
그 말은 뜻밖이었다. 속으로는 ‘너라면 가겠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학교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쿡쿡 찔렸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내가 왜 가? 너나 가라.”나는 그렇게 내뱉었다.
그리고 속으로 ‘정신 나갔나 봐’라며 웃었다.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얼마 후, 책상 위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영어캠프 신청서.’ 하얀 종이 위의 글자들이 눈에 오래 남았다.
‘이걸 써내면 또 상처받는 건 아닐까.’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 번 무너져 본 사람에게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은 희망보다 두려움에 더 가깝다.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신청서를 꺼냈다가 넣고, 펴보고는 덮기를 반복했다.
가족은 몰랐겠지만, 그 종이를 얼마나 만졌는지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마음은 조금씩 흔들렸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가서 뭐가 달라질까?’
‘결국 또 상처만 받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종이는 자꾸 눈에 밟혔다.
눈을 떠도, 밥을 먹을 때도, 잠들기 전에도 그 종이가 내 하루를 지배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진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주 작게 결심이 들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어차피 잃을 것도 없잖아.’
스스로 그렇게 말하자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신청서를 펼쳤다. 손이 약간 떨렸지만, 그 떨림이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펜을 들어 내 이름을 적었다. 다 쓰고 나서도 스스로를 믿을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무언가를 선택한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귀찮음과 공허함 속에서 누군가 대신 결정해 주길 바라던 내가 처음으로 나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멈춰 있던 겨울 속에서, 아주 작지만 분명한 변화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