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함 속의 제안

얼어붙은 겨울, 언니의 한마디가 나를 흔들었다.

by 하루
KakaoTalk_20251112_183704812.jpg 오랜만에 할머니보러 산에 올라감<우리집 산냥이 멍군이랑 장군이>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학교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공허함 사이에 놓여 있었다.
몸은 쉬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긴장돼 있었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두렵고 낯설었다.

조용한 집 안에서도 작은 소리 하나가 크게 울려 퍼지는 듯했고, 불안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눈을 뜨면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습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을 때면 계단 옆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한 번에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나무와 차, 그리고 사람들의 발자국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게 나를 붙잡아 준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시간은 베란다에 서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는 순간뿐이었다.
죽지 않을 만큼만 밥을 먹고, 다시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내 시계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문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계절은 변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봄이 오면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조여들었고 숨이 막혔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점점 사라질 것 같았다. ‘잘 살고 싶은 마음’과 ‘모든 걸 끝내고 싶은 마음’ 이번 갈아 밀려오며 하루하루를 뒤흔들었다.


그 두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며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를 버텼다. 그 시기, 매일 예민하고 날이 선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 건 가족뿐이었다. 가족도 말을 아꼈다. 내가 문을 잘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언니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왜? 무슨 일이야?”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가.”


언니는 문을 열고 들어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시사영어학원에서 영어캠프 한다는데, 한 번 가볼래?”

그 말은 뜻밖이었다. 속으로는 ‘너라면 가겠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학교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쿡쿡 찔렸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내가 왜 가? 너나 가라.”나는 그렇게 내뱉었다.


그리고 속으로 ‘정신 나갔나 봐’라며 웃었다.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얼마 후, 책상 위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영어캠프 신청서.’ 하얀 종이 위의 글자들이 눈에 오래 남았다.

‘이걸 써내면 또 상처받는 건 아닐까.’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 번 무너져 본 사람에게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은 희망보다 두려움에 더 가깝다.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신청서를 꺼냈다가 넣고, 펴보고는 덮기를 반복했다.

가족은 몰랐겠지만, 그 종이를 얼마나 만졌는지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마음은 조금씩 흔들렸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가서 뭐가 달라질까?’
‘결국 또 상처만 받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종이는 자꾸 눈에 밟혔다.

눈을 떠도, 밥을 먹을 때도, 잠들기 전에도 그 종이가 내 하루를 지배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진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주 작게 결심이 들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어차피 잃을 것도 없잖아.’


스스로 그렇게 말하자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신청서를 펼쳤다. 손이 약간 떨렸지만, 그 떨림이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펜을 들어 내 이름을 적었다. 다 쓰고 나서도 스스로를 믿을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무언가를 선택한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귀찮음과 공허함 속에서 누군가 대신 결정해 주길 바라던 내가 처음으로 나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멈춰 있던 겨울 속에서, 아주 작지만 분명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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