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로 볼 때, 흔들리지 않는다

숨은 채로 자라는 중입니다 6

by 유신유

「나를 인정하고 나를 사랑하면
나는 더 단단해지고 나다워진다.

따뜻함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고 서게 된다.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다.
너 자신을 바로 보면 흔들리지 않는다.」


한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더 중요했다.
칭찬은 곧 존재의 증명이었고,
비판은 나라는 사람 전체에 대한 부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자꾸 흔들렸다.
좋은 말을 들으면 기세등등해졌다가, 작은 오해 하나에도 무너졌다.
내 안의 기준이 없으니 누구의 말에도 휘청거렸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섰다.


‘나는 왜 나를 믿지 못할까?’

‘왜 이렇게 자주 흔들릴까?’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않고,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나를 바로 보고, 이렇게 살아낸 나를 인정해주는 것.


그게 단단함의 시작이라는 걸.

내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의 시선은

더 이상 ‘기준’이 아니라 하나의 ‘참고’가 되었다.

이제는 내 안에 중심이 있다.

그 중심이 따뜻할수록, 나는 나다워질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자주 흔들린다는 것은,
그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중심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다.


나 자신을 바로 본다.
판단이 아니라, 이해와 사랑으로.









나는 오랫동안 나의 가치를 내 기준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측정하며 살아왔다.
누군가의 칭찬은 마치 존재의 증명처럼 느껴졌고,

작은 비판조차도 나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 아프게 다가왔다.


그 결과, 나는 늘 타인의 말에 쉽게 들뜨고 쉽게 무너졌다.
내 안에 기준이 없었기에, 바람처럼 흔들리는 날들이었다.



타인의 시선 위에 있던 삶


어릴 때부터,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은 거의 무의식적인 삶의 동력이었다.
칭찬은 나의 존재를 인정받는 기분이었고, 사소한 비난도 나의 전부를 부정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선생님이 한 마디 칭찬해 주면 하루 종일 기뻤고,
작은 오해 하나에도 깊은 자기 의심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기쁨과 절망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는 감정의 패턴이 삶을 지배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모든 감정을 붙들어줄 내면의 기준이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믿는지 말해줄 나만의 나침반이 없었다.
그 빈자리는 다른 사람의 말들이 너무 쉽게 파고들었고, 눈치를 보며 자아는 점점 불안정해졌다.


결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에게 기대에 부응하려 애썼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는다고 믿었기에 스스로를 계속 불만족스럽게 여겼다.


이상은 멀었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인생을 지었고,

스스로에 대한 수용을 외부에서 구하게 되었다.


나 자신에게 주지 않은 사랑과 인정을, 다른 사람이 채워주기를 바랐다.

그건 너무도 외롭고 흔들리기 쉬운 관계였다.



나의 가치 인식


이 혼란 속에서, 나는 문득 내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왜 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할까?”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걸까?”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나는 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스로의 가치를, 타인의 시선 없이 바라본 적이 없었다.
늘 더 나아진 ‘나’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는 한 번도 충분했던 적이 없었다.


이 깨달음은 내게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그동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인

‘나와 나 자신’의 관계를 외면하고 있었다.


자기 수용의 여정은 내 안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건 단순히 생각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전환하는 일이었다.

남들의 눈으로 나를 평가하던 시선에서, 이해와 연민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성취와 완벽함이 아닌, 모든 불완전함을 가진 나 자신을 그대로 껴안아주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수십년간의 습관과 사고방식은

성취와 승인만이 가치를 증명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 믿음을 깨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과 성찰이 필요했다.

나는 내가 부적절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을 살펴보았고,
그 아래 깔린 신념과 패턴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면의 중심 구축


내 중심에는 '자기 연민'이 있었다.
친구에게 하듯, 내 단점과 상처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글을 썼다.
가혹한 자기 비판에서 벗어나 이해와 친절의 언어로 나 자신을 대하는 법을 알아갔다.


그러면서 점점 깨달았다. 내가 갈망한 것은 강한 마음이 아니라, 연결과 수용에 대한 깊은 욕망이었다는 것을.


자기 수용이 깊어질수록, 타인의 시선은 나를 규정하는 힘을 잃었다.

칭찬은 고마운 말이 되었지만, 더 이상 그것이 나의 가치를 대신 말해주지는 않았다.
비판은 참고할 말이 되었지만, 그 말 때문에 무너지진 않았다.


관계 또한 달라졌다. 필요를 채우기 위한 만남이 아닌,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 안의 중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세상과 맞서기보다는,

내면의 따뜻함과 안정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힘을 키워나갔다.


내 기준이 생기고, 그 기준이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불완전한 나를 포용한 채 더 깊고 진실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갔다.



판단에서 이해로의 전환


자기 수용이 자라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판단에서 이해로 옮겨졌다는 점이었다.

예전의 나는, 무언가를 해내지 못했을 때 그저 실망하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왜 또 이 모양이야."
"난 왜 항상 부족할까."


익숙한 자기비판이 습관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실수했을 때, 부족한 내 모습이 보였을 때, 조금 멈춰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때 난 어떤 마음이었니?'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니?'
'그걸 알아차린 나라면, 다음엔 조금 다르게 해볼 수 있겠니?'


이제는 실패도, 흔들림도, 그저 살아 있는 나의 일부라는 걸 안다.
그 마음을 밀어내지 않고 들여다보면 조금은 다정하게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 태도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도 이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속으로 비난하거나, 섣불리 해석했을 순간들에 이제는 한 박자 느리게 멈춰 서서 생각한다.


'저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을까?'
'그 사람에게도 설명되지 않는 내면이 있었던 건 아닐까?'


자신을 받아들일수록, 타인에게도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의 공간도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


자기 수용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선물했다.
이제는 타인의 기대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의 칭찬이 없어도, 나의 선택과 나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비판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고, 때론 서툴러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나,

그런 내가 함께 있으니 안심이 된다.


내 안의 중심이 조금씩 자라났다.

그 중심은 혼란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 되었고,
무너짐 앞에서도 다시 나를 세울 수 있는 따뜻한 기반이 되었다.


그 여정은, 더 이상 외부로부터 내가 괜찮다는 허락을 받으려 애쓰지 않고,
내 안에서 스스로에게 그 허락을 내리는 길이었다. 이 길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때로는 다시 돌아가고, 멈추었다가 천천히 나아가는 여정이다.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만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흔들리는 건 약함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그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품어주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회복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기 수용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 단단함은 뻣뻣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하기에 부러지지 않는 단단함이다.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고,

흔들리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

그게 진짜 중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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