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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별 Aug 01. 2017

여름밤 회상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오래간만에 익숙한 골목을 지나는 바람에 당신 집에서 보낸 어느 여름밤이 떠올랐어.
우린 맥주를 나누어 마시곤 동네 마실을 나왔어.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그냥 아주 어둡기만 했어.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지. 비가 그친 후에 부는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았고, 내 옆에서 발을 맞춰 걷는 사람이 당신이라 기분이 좋았어. 그냥, 그냥 날이 저물도록 당신과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으슥한 골목이 나오면 건물 그림자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입을 맞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한 걸음으로 다시 가로등 밑으로 나오기를 반복했어. 하지만 숨기려고 해도 붉어진 뺨이 이미 말해주고 있었어.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고. 그토록 사람의 체온이 싫은 여름에도 우리는 기꺼이 서로이기에,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고.
부는 바람마저 어떤 달콤한 의미를 가진 건 아닐까 궁금하게 만드는 멜로디로 들렸던 밤. 드문드문 켜진 불빛이 제각기 다른 집의 창문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밝아 밤, 새벽, 아침이 밝아오기 직전까지 온통 하얗게 만들어 잠도 잊고는 사랑을 나누게 하던 우리의 마음이 참 좋았고, 정말 좋았어. 그 이후에 받은 모든 상처와 냉소까지 모두 지워버리고, 아직도 내 머릿속에 당신과의 가장 큰 추억으로 남겨뒀을 정도로.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데는 그렇게 환한 추억만 있으면 되는 것 같아. 유효기간이 지날 대로 지난 아픔을 껴안고 살아봤자 그 누구도 동정해주지 않으니까. 나도, 심지어 당신도 불쌍하게 여겨주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사랑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서로로 인해 행복했다는 사실만 남겨두자.
또 바람이 잠깐 불어. 창밖으로 지나가는 나무를 흔들고, 내 마음을 흔들어. 어쩐지 오늘은 조금 보고 싶은 것 같아. 바람 탓이라고 생각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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