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령 (2)

낙태령 - 1부

by 이시온

도시는 들끓었다. ‘우린 열심히 살았다는 죄밖에 없는데 왜 세금이 저들에게 쓰여야 하냐’는 불만은 점점 분노로 부풀어 올랐다. 가장 폭발적이었던 계층은 다름 아닌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중산층이었다. 그들은 ‘바깥’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고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의 화살은 사실 바깥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 언젠가 바깥에 설지도 모르는 자기 운명의 그림자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성실하게 노력했기에 도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노력에 대한 믿음은 곧 혐오에 대한 정당성이었고, 그리고 간절한 믿음이야말로 높아져만 가는 고층빌딩 속 사회에서 자신이 존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들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믿음은 ‘바깥’의 사람들을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에겐 바깥의 사람들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 게으른 자, 무책임한 자, 의지가 없는 자로 낙인찍었다. ‘네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단호한 판단은 사실 ‘나도 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애써 덮어씌우려 외워대는 주문이었다. 그 주문을 입 밖으로 되뇌어야만 그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귀와 눈에 닿는 바깥의 소식들은, 언제든 자신들도 그곳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끔찍한 경고처럼 다가왔다.


승자의 교만은 패자의 굴욕을 먹고 자란다. 누군가가 ‘내가 가진 것은 내 능력의 결과’라 외칠 때마다, 다른 누군가는 ‘네가 가지지 못한 건 네 잘못’이라는 낙인을 뒤집어써야 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산층은 이 굴욕을 보며, 그리고 느끼며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그 불안을 지난 몇 십 년간 정치와 언론은 기민하게 길들여왔다. “성실한 자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구호는 위안처럼 들렸으나, 실은 분노와 절망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굴레였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위에 있는 구조가 아니라, 자신보다 아래라 여겨지는 타인을 향해 날을 세우도록 길들여졌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 전체의 불평등이라는 뿌리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바라보지 않는 편을 택했다. 자신들도 피해자인 이 불평등의 구조를 직시하고, 파헤쳐서, 새로운 사회를 재구성하는 대신, 자신들보다 비교적 ‘게으른 이들’, ‘의지가 없는 이들’, ‘책임지지 않는 부모들’을 겨냥하는 것이 훨씬 쉽고 안전했다. 그렇게 분노의 화살은 항상 아래를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려만 갔다. 권력과 제도를 향해야 할 분노는 끝내 더 약한 이들을 향하였고, 그 화살들은 결국 굴절되어 되돌아와 그들 자신의 상처와 불안을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분노와 혐오는 마침내 신념처럼 굳어졌다. ‘노력하지 않는 자를 돕는 건 불공정하다’는 말은 정의감의 언어를 빌린 것 같았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과 자기 방어가 깊숙이 숨어들었다. 노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들이 그 굴레에 속박된 존재라는 것을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그 마음은 사회를 더 나누고, 사람들을 서로 적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누구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했다.


뉴스 역시 이 혐오의 흐름에 탑승하여 기름을 들이부었다. 모두가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으며 티비를 시청하는 저녁 9시, 전국에 생중계되는 메인 뉴스 화면에는 언제나 바깥의 범죄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나섰다. 자극적이고도 참혹한 사건들인 살인, 강간, 방화는 마치 바깥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처럼 편집되고 왜곡되어 모든 집안으로 송출되었다. 카메라에 잡힌 낡은 건물과 쓰레기 더미, 욕지거리를 해대며 경찰에 끌려 나오는 청소년들의 얼굴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술을 마신 채 한밤중에 훔친 차를 몰고 도시의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는 영상, 도시 안의 무인 편의점에 몰려가 진열장을 통째로 털어가는 영상, 도시의 편의점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워대며 술을 마셔대는 영상. 패널들은 끊임없이 나와 바깥과 바깥을 어떻게 ‘처리’할 것 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언론은 끊임없이 “범죄 온상”이라는 단어를 붙여 바깥을 묘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수백만의 조회수와 수만 개의 댓글을 끌어냈다. 댓글은 분노와 혐오로 가득했다.


“저 벌레 같은 새끼들, 그냥 전부 없애야 한다.”

“세금으로 밥 주는 것보다, 차라리 감옥에 다 사형시켜라.”

“저 새끼들은 인간이 아니야.”


이렇게 인터넷이 바깥의 사회에 대해 뜨겁게 달궈지자 도시의 인터넷 방송인들은 카메라를 들고 바깥을 누비기 시작했다. 골목골목 숨겨진 빌라촌들 앞에선 할 일 없는 아이들이 모여 술만 마셔대며 시간만 때우는 장면들. 그들의 카메라가 좁고 습기 찬 골목길을 비출 때면 어디선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어가다 벽을 짚고 넘어져 자신의 토사물 위에 지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클로즈업할 때마다 조회수는 단번에 뛰었다. 담배를 물고 침을 탁 내뱉는 아이,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 꼬마가 상스러운 욕을 내뱉으며 꺄르르 웃는 장면은 언제나 수천 개의 좋아요와 후원을 불러왔다. 방송인들은 마치 아직 사람과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를 탐험하는 모험가가 된 듯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리고 그들의 화면 속에 비친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기괴하고 불결한 풍경, 조회수를 올려주는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방송인들이 아이들에게 비아냥대며 말을 걸었고, 아이들이 발끈하며 쏟아낸 욕설만이 가득한 대답은 즉시 조롱거리로 편집되어 채널들에 올라갔다. 영상이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모욕적이면 모욕적일수록, 더 대중들에게 잘 팔렸다.


댓글창은 또다시 불타올랐다.


“봐라, 인간 새끼들이 아니잖아.”

“이래도 쟤네들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냐?”


인터넷 방송인들은 알았다. 이 분노가 돈이 된다는 걸. 조회수는 광고로 이어졌고, 구독자는 후원으로 이어졌다. 도시는 바깥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소비했다.


사람들은 바깥을 욕하는 게 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저 재미있었다. 어떤 글을 올리든지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욕지거리만 하면 곧바로 ‘재미있는 글’이 되었다. 세금 빨아먹는 빨대충들, 더러운 기생충들. 이런 댓글이 달릴수록 사람들은 웃었고, ‘좋아요’를 눌렀으며, 더 과격한 말들을 덧붙여 나갔다. 누구 하나 제동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극적이고 더 조롱 섞인 말들이 올라올수록 더욱 뜨거워질 뿐이었다. 도시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거나 민폐를 끼치는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올 때마다 댓글창은 빠르게 움직였다. ‘빨대충들아님?’, ‘외국인임’, ‘바깥 가려면 여권 들고 가야 함ㅋㅋㅋ’ 댓글들이 줄지어 달렸다. 누군가는 ‘빨대충들 여기 못 오게 막으면 안 되냐?’고 썼고, 그 밑에는 수십 개의 동의 댓글이 꼬리를 물었다. 이러한 댓글이 달리면 달릴수록 사유하는 사람들의 흔적은 희미해져만 갔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혐오는 더 이상 특별한 감정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미워한다는 수치심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혐오가 혐오이지 않게 된 세상. 그것은 너무나 대중적이고, 너무나 일상적인 소비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유머처럼 혐오를 즐겼고, 분노를 쾌락처럼 씹어 삼켰다. 서로를 확인하며 웃고, 그 웃음을 통해 자기들이 속한 이곳이 얼마나 ‘안전한 곳’인지 확인했다. 대한민국이 다다른 현실은 바로 그것이었다. ‘바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쓰레기통. 그곳을 향해 무엇이든 던지면 손해 볼 게 없었고, 오히려 인정받았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혐오의 기계, 증오의 공장이 끝없이 가동되는 듯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공장의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몇몇의 사람들은 바깥의 아이들을 측은히 바라보았다. 태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아이들이, 부모 자격이 없는 사람들 밑에서 태어나, 애정 한 번 받지 못한 채 방치된다는 사실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골목마다 퍼져 있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학교에서 굶주려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든 아이들, 청소년이 되어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욕설을 내뱉는 모습은 이미 ‘한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씌워진 숙명 같은 불행으로 보였다. 겉으로는 굉장히 안타까움과 측은함으로 포장되었으나, 이 생각의 종착점은 다른 도시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공감하는 한 가지, 아이가 태어나 불행해지는 건 아이 탓이 아니라, 그 부모가 감당할 능력도 애정도 없으면서 출산을 했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 그 논리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했다. ‘아이들이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부모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부모가 될 권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 그리고 이 주장은 곧 도덕적 당위로 포장되었다.


방향이 다른 분노와 절망감은 하나의 집단적 합의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합의 위에 정치가 달려들었다.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강력한 대책’을 외쳤다. 누군가는 ‘청소년 범죄자라도 성인과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싹 다 사형시켜야 한다’ 고도했고, 또 누군가는 ‘더는 이런 쓰레기들에게 세금 한 푼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분노에 휘둘린 국민들은 환호했고, 언론은 그 환호를 다시 확대했다. 그렇게 사회 전체가 점점 더 단순하고, 점점 더 잔혹한 해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마침내 내놓은 해답은 간단했다. 저들의 번식을 막는 것, 그리고 배운 이들, 엘리트들, 상류층과 중산층의 임신과 출산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는 것.


정치도 곧바로 응답했다. 유권자들의 대부분은 이미 중산층과 상류층이었고, 표를 잃는다는 것은 곧 권력을 잃는 것과 같았다.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눈에도 저 바깥에서 살아가는 인구는 ‘줄어야 할 존재’였고 그들의 유권층은 ‘늘어야 할 존재’였다. 그들은 국가의 자원이 아니라 국가의 짐이었다. 세금을 집어삼키는 구덩이였고, 미래를 갉아먹는 그림자였다. 하지만 단순히 장기적인 투자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새로운 학교를 짓고, 보조금을 더 주며, 범죄 예방을 위해 시설을 늘린다 한들, 시민들의 분노는 잠잠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정치인들은 그 불길이 언제 자신들의 자리까지 태워버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즉각적인 희생양과 즉각적인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가난한 이들의 출산으로 향했다.


2037년의 대한민국 국회. 유례없는 속도로 [출산관리 및 생명보호법] 법안이 상정되었다. 회의장은 이미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여야 의원들의 표정은 서로 달랐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권당은 국민의 분노를 등에 업고 밀어붙였고, 야당조차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다. 반대하는 순간, 자신들이 ‘벌레들의 편’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몇몇 의원들이 조심스럽게 헌법과 인권을 언급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휘청이며 금세 묻혔다. 회의장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 광장을 가득 메운 수십만 군중의 고함소리가 국회 담장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을 지켜라!”

“아이들 미래를 빼앗지 마라!”

“벌레들을 때려잡아라!”


창문 너머로 울려 퍼지는 함성은 법안 통과의 피날레 같은 음악이었다. 투표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찬성 268표, 반대 12표, 기권 20표. 의사봉이 쾅 내려치는 순간, 국회는 잠시 적막에 휩싸였고, 곧이어 폭발적인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날 저녁, 대통령은 긴급 담화문을 발표했다. 카메라 앞에 선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국민을 향해 선언했다.


“오늘, 우리나라는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무분별한 출산, 방치된 생명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삶을 책임집니다.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는 출산은 관리될 것이며, 생명은 보호될 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고, 국민들은 TV 앞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누군가는 태극기를 흔들었고, 누군가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도시는 축제 같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분노가 법으로 정당화되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저 빈민가의 아이들을 향한 혐오가 법률의 이름으로 승인받았음을 느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깥의 허름한 반지하, 좁은 고시원의 방, 버려진 공장의 음습한 구석에서 사람들은 입을 틀어막은 채 조용히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법의 칼날이 누구를 향하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축제 같은 광장과, 죽음의 공포로 뒤덮인 골목.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간에, 전혀 다른 두 개의 대한민국이 존재하였다.


곧이어 법문 전문이 발표되었다:


「출산관리 및 생명보호법」

제1장 총칙

제1조(목적)

이 법은 국가의 인구 균형과 사회적 비용 절감을 위하여 출산을 관리하고, 허가되지 아니한 임신 및 출산을 방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① “출산 제한 대상”이라 함은 제2장에 열거된 범주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

② “허가출산증”이라 함은 출산 제한 대상이 임신 및 출산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발급하는 행정문서를 말한다.

③ “불법임신”이라 함은 출산 제한 대상이 국가의 허가 없이 임신한 상태를 말한다.

제2장 출산 제한 대상

제3조(출산 제한 대상의 범위)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가정은 국가의 허가 없이는 임신 및 출산을 할 수 없다.

① 본인 또는 배우자가 금고 이상의 형사 전과를 가진 경우

② 국가가 지정하는 범죄율이 높은 업종(이하 “위험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

③ 가구 소득이 국가가 정한 최저 생계 수준에 미달하는 경우

제4조(허가출산증 발급)

① 제3조에 해당하는 가정은 임신 및 출산 전에 반드시 허가출산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④ 허가출산증은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라 엄격히 심사하여 발급한다.

⑤ 허가출산증을 발급받지 아니하고 임신, 출산을 한 경우, 해당 행위는 불법임신으로 간주한다.

제5조(정기 임신 검사 의무)

① 제3조에 해당하는 가정은 3개월마다 국가가 지정한 의료기관에서 임신 검사를 받아야 한다.

② 검사 결과는 즉시 생명보호단속국에 보고된다.

③ 이를 거부하거나 허위로 보고한 경우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6조(불법임신에 대한 조치)

⑥ 불법임신이 확인될 경우 국가는 즉시 선정 의료기관을 통해 임신 중단 조치를 시행한다.

⑦ 불법임신을 은폐, 도피한 경우, 배우자 및 직계 가족을 공범으로 간주하여 처벌할 수 있다.

⑧ 법령의 시행 시점에 제3조에 해당하는 가정의 6주 내 태아는 불법임신으로 간주, 임신 중단 조치를 시행한다.

제3장 일반 출산

제7조(출산의 자유)

① 제3조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별도의 허가 없이 임신 및 출산을 할 수 있다.

② 국가는 일반 출산 가정에 의료, 교육, 등의 기본적 지원을 제공한다.

제4장 국가의 의무

제8조(허가출산 가정 지원)

① 허가출산증을 발급받은 가정은 일반 출산 가정과 동등한 기본적 지원을 제공한다.

제9조(단속 및 관리)

② 생명보호단속국은 본 법의 집행을 전담하며, 임신 검사, 불법임신 단속 및 강제적 조치를 수행한다.

③ 단속 과정에서 저항 및 위협이 발생할 경우, 생명보호단속국은 필요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

제5장 벌칙

제10조(위반자 처벌)

① 불법임신을 한 가정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불법임신을 방조하거나 은닉한 제삼자 또한 동일하게 처벌한다.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국회 앞 광장은 함성으로 진동했고, 화면을 통해 중계된 대통령의 담화문에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완벽했다. 이제야 말로 정의가 바로 섰다는 착각, 마침내 저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고, 내 노력으로 온전히 일해 번 돈과 피 같은 세금은 더 이상 저들에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신문 1면에는 굵은 활자로 제목이 박혔다. ‘출산관리 및 생명보호법 통과 - 국민의 세금, 국민에게 돌아온다’ 뉴스 앵커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인터넷 댓글창은 축제와도 같았다.


“와 드디어 정신 차렸네 ㅋㅋ”

“이제 기생충 같은 새끼들은 볼 일 없겠네.”

“저런 답 없는 새끼들 말고 우리한테 투자 좀 해봐라. 그게 진짜 복지 아님?”


사람들은 확신했다. 저 문제아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고, 거리를 배회하는 불량 청소년 무리들도 사라질 것이다. 버스 안에서 욕을 내뱉던, 골목에서 오토바이를 질주하던 그들의 얼굴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조금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곧바로 새로운 관리 감독 기관이 신설되었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단순했다. 법을 집행하는 것, 불법적 출산을 뿌리 뽑아 대한민국을 보호하고 국민들의 생존권을 수호하는 것. 새까만 제복에 어깨에는 은빛 휘장이 반짝였다. 휘장 위 굵직하게, 그리고 깊게 새겨진 단어, ‘생명보호단속국’. 바깥은 위험한 지역이었기에 단속관들의 신원을 보호할 검은색 안면마스크가 지급되었다. 새까만 제복은 군용 방검섬유로 제작되어 한층 바깥의 범죄로부터 단속관들을 보호했다. 위험한 구역을 누비는 만큼 곤봉, 테이저건, 수갑, 때로는 권총까지 허리에 찼다. 검은 마스크에 가려져 밤에도 낮에도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 없는 군상. 법이 시행되자 그들은 곧장 움직였다. 생명보호단속국의 휘장이 새겨진 검은 승합차들이 각 구역의 골목으로 들어섰고, 서너 명의 단속관들이 내렸다.


그들은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렀다. 반드시 복지사 혹은 동사무소 직원을 대동하여, ‘행정 절차’를 지켰다. 바깥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집에서는 문이 열리자마자 단속관들을 보곤 ‘저리 꺼져라!’라며 술 냄새와 담배 연기에 찌든 목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당연히 바뀌는 건 없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봤자 그들의 목소리는 이를 위협으로 간주한 단속관의 뒤따르는 곤봉에 금방 묻혀 사라졌다. 그 후 단속관은 앞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필수적으로 전달해야 할 서류들을 내밀었고, 복지사가 떨리는 입으로 법률 내용을 설명했다. 그걸 본 다른 집에서는 말없이 문을 열고 조용히 서류를 받아들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지만, 얼굴은 마치 ‘저항하지 않겠다, 그러니 그냥 지나가라’는 무언의 신호처럼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골목 곳곳에서, 창문 너머로, 검은 제복의 그림자가 스쳐가는 순간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거리를 걷는 그들의 구둣발 소리는 사람들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위협이었다.


2주간의 의무 임신 검사가 끝나자, 승합차 안으로는 연이어 사람들이 던져졌다. 대부분은 경제적 사유로, 범죄 경력으로, 혹은 위험 직업군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임신 자격을 박탈당한, 아직 6주도 채 되지 않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에겐 집행 대상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 중 일부는 숨기에 급급했다. 옆집 문을 두드려 좁고 곰팡내 밴 옷장 속으로 몸을 구겨 넣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가쁜 숨을 삼켰다. 문을 열고 들어선 단속관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가족과 이웃, 그리고 남편들이었다. 그러나 곤봉이 몇 차례 휘둘러지자 그들 또한 허무하게 쓰러져 나갔다. 몇몇은 저항조차 하지 않고 조용히 승합차에 올랐다. 이유를 따질 기력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중절이 덜 고통스러운 선택처럼 보였다.


외신들은 연일 한국의 새로운 법률을 대서특필했다. 세계 각국의 메인 화면에 큼지막한 자막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출산관리 및 생명보호법 전격 시행, 세계 최초’ 앵커들의 표정은 놀람과 당혹감이 섞였다. 단순히 인구 문제를 넘어선, 윤리적이고 인권적인 지점에 다다른 문제였다. 서방국가들의 패널들은 연신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명백한 위헌적 조치입니다. 여성의 몸은 국가의 것이 아니에요!”


한 인권 변호사는 카메라를 향해 단호하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짓눌린 수많은 사람들의 절규를 대변하는 듯 울림이 있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


"임신과 출산은 국가의 생산 계획에 따라 조율되는 차가운 통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삶과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내밀한 권리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아 갈 수 없는 권리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법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부유한 이들은 여전히 선택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그 권리를 박탈합니다."


"선택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서마저 ‘선택의 가능성’조차 지워버리는 것, 그것이 과연 정의로운 법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이 법은 가장 약한 사람들의 몸과 인생을 국가가 마음대로 통제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미래는 본인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게 정의입니까? 그게 문명사회가 해야 할 일입니까? 진정한 정의와 문명은, 힘 있는 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자의 권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데 있습니다. 이 법은 정의를 가장한 차별이며, 문명을 빙자한 퇴보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원한다면, 약자의 권리를 지켜내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그들의 얼굴을 비췄다.

옆에 있던 다른 인권 활동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지금 국민을 선별하고 있습니다. 낳아도 되는 인간과 낳아서는 안 되는 인간을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건 통제국가, 전체주의의 길이에요.”


그러나 바로 옆 패널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습니까?”


목소리에는 날 선 비웃음과 동시에 억눌린 분노가 섞여 있었다.


“아이들이 방치된 채 거리를 떠돌고 있어요. 10대가 무리를 지어 절도와 폭력을 일삼고, 심지어 끔찍한 강력 범죄까지 저지릅니다. 이건 단순히 개별 가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 전체를 잠식하는 암이에요.”


그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 치며 말을 이어갔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수십 년 동안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었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복지를 늘리고, 더 나은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 각종 지원금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범죄율은 오히려 높아졌고, 불우한 이들의 무책임한 출산은 더 늘어났으며,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점점 늘어나 대한민국의 사회는 점점 더 피폐해졌습니다. 노력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근본적이고 단호한 해결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비단 오늘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20여 년 전 유럽에서도 똑같은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고요. 일하지 않고, 배우지도 않고,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이민자들이 복지만 받아먹으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받는 돈은 묵묵히 일하며 세금을 내는 국민이 얻는 것보다도 많았습니다. 그 결과는 뻔했죠. 복지에 기대어 무너져가는 사회, 그리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젠 대한민국의 차례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비겁한 복지주의의 환상에 매달릴 수 없었고 선택의 순간이 도래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마침내 옳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저 나라가 다시 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법은 여성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닙니다. 사회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예요. 아이를 낳아도 기를 수 없는 가정, 부모 자격이 없는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건 결국 사회적 폭탄을 키우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폭탄이 터지기 전에 막는 게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옆자리에서 다른 패널이 끄덕이며 거들었다.


“이건 단순히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무 조치도 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저 대한민국이라는 무너질 겁니다. 이미 중산층은 붕괴되고, 치안은 흔들리고, 세금은 바닥나고 있습니다.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에요.”


토론은 늘 격렬했고, 방송이 끝날 때마다 SNS에는 수백만 건의 댓글이 쏟아졌다. 자유와 권리를 목청껏 외치는 이들, 반대로 ‘한국은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라며 두둔하는 이들. 그러나 결국, 서방국가들과 개발도상국들은 등을 돌렸다. 모두가 알았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곧 자신들이 직면했던,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또는 직면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복지국가의 허상과 패망이라는 단어는 이미 각국의 헤드라인을 점령하고 있었고, 한국은 단지 그 파국을 인구 절벽과 전 세계적으로도 견줄만한 빈부격차로 가장 크게 맞이했을 뿐이었다. 이렇듯 전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결국 모든 소음 위에 가장 크게 울려 퍼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환호성이었다.


환호성이 맴도는 중, 그 소리에 묻힌 채 아무도 없는 작은 빌라 안을 조용히 채우고 있는 건 한 갓난아이의 울음이었다. 태어난 지 두 달, 따스한 손길과 무한한 사랑 속에 있어야 했을 그 시간.

가희. 양가희. 사람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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