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livia Jun 06. 2021

언제나 꿈을 꾸는 아이였는데

10년 전, 고등학교 1학년에 들어서 학생 기록부를 작성할 때였다. 나의 장래희망 칸에 축구기자, 부모님의 희망 칸에도 축구기자를 적었다. 담임 선생님은 “너의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 한 길로 한정 짓지 말아라”는 말씀과 함께 축구기자에서 기자로 변경하길 권하셨다. 17살 나에겐 너무 확고한 꿈이었으나 선생님 조언을 따라 장래희망 칸에 기자라고 적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나의 은사였다. 대학 입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만들어진 강남 한복판에서 공부보다 축구경기가 우선이던 나는 선생님들의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2학년 담임 선생님은 굉장한 축구 팬이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존중하는 어른이었다. 지역 학생 기자단 신청서를, 대한축구협회 학생 봉사활동 참가서를 말없이 찾아 건네주신 그분 덕분에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의 꿈이 확고해서 멋있다. 부럽다”였다. 강남 바닥에서 경쟁이 치열한 학교에 다녔지만 성적에 흥미가 없었고 내신관리를 위해 원치 않는 과목을 선택하는 것 대신 내가 관심 있는 과목을 선택했다. 전교생 중 4명이 선택한 과목에서 1등 한 것이 뿌듯했으며 모의고사 성적이 좋지 않아도 학생 신문에 나갈 기사를 쓰는데 행복했다. 그렇기에 공부 잘하는 친구들 속에서 성적이 안 좋은 나는 튀는 아이였음에도 자존감이 낮지도, 그 친구들이 부럽지도 않았다.


오직 그 꿈 하나를 붙잡고 성인이 됐다. 그 꿈 하나를 보고 한국에서 대학교를 자퇴하고,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끊임없이 대외활동을 하며 여러 경험을 쌓았다. 내 마음가짐, 비용, 경험의 삼각형이 완성됐을 때 나는 스페인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운이 좋게 공부를 하면서도 특파원 신분으로 축구기자 일까지 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 온 4년 동안 쉬지 않고 내 손으로 돈을 벌었다. 쥐꼬리만 한 돈이었으나 유학생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운이었다. 게을렀던 10대 시절을 반성하듯 열심히 살았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매일 밤새 공부할 정도로 공부가 재밌었고, 언어적 핸디캡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동시에 축구기자라는 내 꿈을 이루면서 성취감도 맛봤다. 하지만 모든 게 반대가 되듯, 나라는 사람 역시 180도 바뀌어있었다.


내 중심이 반듯해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존감도 높으며 행복했던 그때의 나는 사라졌다. 스페인에 와서 내 목표를 하나씩 이뤄가고 있지만 동시에 자존감은 매일매일 낮아졌고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날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슬럼프일까.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걸까. 갑자기 변해버린 내 성질에 스스로가 버티지 못했던 걸까. 17살, 꿈을 갖고 있어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받던 나는 이제 없다. 이미 이뤄버린 목표를 붙잡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원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일도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자만했다. 더 이상 꿈꾸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나는 없다. 10년 전 담임 선생님 말이 맞았다. 언제나 이 꿈과 함께 살아갈 줄 알았던 것이 허황된 꿈이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 속에서 20대 후반에 접어들어 길을 잃었다. 언제나 꿈을 꾸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너무 쉽게 혐오를 말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