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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소시민 Jul 18. 2023

교토에서 저녁을

일찍 일어나는 여행자가 청수사를 선점할 수 있다.

 청수사가 만약 말을 할 수 있다면 '니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웬만한 건 다 준비해 뒀어.'라고 말을 건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여행자들이 보고 즐길 것들이 많다. 소원을 써서 걸 수도 있고 눈을 감고 반대편까지 잘 걸어가서 사랑의 돌에 닿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지슈신사도 있다. 물을 마시면 건강이며 학업 혹은 연애에 효험이 있다는 오토와 폭포도 유명하다. 소원을 쓰고 친히 몸을 놀려가며 걷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며 올라가면 교토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는 그럴싸한 풍광까지 거의 종합선물세트 수준이다. 여기에 이 청수사에서 떨어져서 살아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까지 갖춘 곳. 절을 구경하고 나면 일본색이 그대로 묻어나는 상점들과 거리는 덤이다.


 내가 선호하는 여행지는 그 나라의 문화가 잘 묻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일본 안에서도 도쿄와 같이 도시 문화가 발달한 곳보다는 옛 문화를 잘 담아낸 고적지나 사찰, 박물관이 많은 교토를 더 좋아한다. 불교 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신에 가까운 민간 신앙을 믿는 사람도 아니지만 교토 안에서는 청수사를 특히 더 좋아한다. 일본다움이 가장 잘 묻어난달까?



 어쨌든 그래서인지 청수사만큼은 꼭 내가 먼저 선점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기 시작했다. 청수사가 열리는 시간은 아침 여섯 시. 버스 첫차는 5시 30분. 해 볼만 하겠다 싶었다. 이른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겠............지. 그럼.. 힘들지. 그건 무리라고 봐. 그래서 일단 6시 반에 일어나 씻고 준비하기로 했다.


 짜잔~!!! 이게 웬일!! 일어났다!! 그것도 알람보다 10분 일찍!!! 아싸~!!! 씻고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청수사로 올라가는 길에 내리니 딱 아침 일곱 시. 여행자가 거의 없는 이른 아침의 청수사 가는 길. 그 설렘이란. 눈이 소복하게 내린 거리를 가장 처음 밟는 듯한 그 설렘과 짜릿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올라온 청수사에는 나처럼 아침 청수사를 누려보겠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문제는, 양보라든지 혹은 배려라든지 하는 것들은 호텔에 두고 나온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사람들만 나왔다는 거지. 고즈넉한 청수사는 안타깝지만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절 안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다니지,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향해 더 큰 소리로 잔소리를 해대고 있지, 그 와중에 다른 관광객들은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사진을 찍어대는데 정말 하마터면 그 나라 사람들을 싸그리 똑같은 인간들로 취급할 뻔했다. 분명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을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진심으로. inner peace를 읊조리며 참을 인을 마음에 꾸욱 눌러새기며 청수사를 거닐었다.


니가 그 사람들의 상황을 다 알까?


 "주님, 불당에서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 아닐 수도 있는데요. 저 사람들 너무 무례한 거 아닐까요? 어휴, 정말이지. 제가 저걸 문제로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저렇게 떠들고 다니며 무례하게 행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속상한 마음을 투정하듯 읊조리며 기도하는데 문득 마음 깊은 데서 이런 울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니가 그 사람들의 상황을 다 알까? 저 사람들에게는 저 사람들만의 이유와 맥락이 있는 건 아닐까?'


 순간, 얼음.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었네. 내가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경주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불국사 근처였나 아니면 다른 데였나. 어쨌든 농촌에서 오신 듯 보이는 여러 어르신들이 관광버스 주차장 앞에서 뽕짝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놀고 계셨다. 그게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럽고 아주 조금 못되게 이야기하면 천박하고 상스러워 보였다. 친구들에게 우리는 저렇게 늙지 말자고, 저게 무슨 추태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는데 그 때 같이 갔던 친구 녀석이 아주 나긋하면서도 딱부러지게 이야기를 했다.


 "맞아. 분명 좋은 풍경은 아니지. 아닌데, 저렇게 관광 오시는 분들 대부분은 농촌에서 일 년 내 농사 짓고 밭일 하시다가 시간 내서 오시는 분들이야. 험난한 농촌에서 자기 몸 깎아가며 험난하게 노동을 하시느라 어떻게 노는 게 제대로 노는 건지 누가 알려준 적도 없고 그러니 배운 적도 없으시지. 나도 처음엔 저게 저렇게 부끄럽고 그랬는데 가끔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기도 하고 또 저렇게라도 노실 수 있어 다행이다 싶더라. 농촌에서 농사 짓고 사시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가족들 건사하고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자기 생을 다 바친 분들이잖아. 우리 그렇게 생각하자."


 그 친구 덕분에 시골에서 오신 어르신들의 관광 버스를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었다. 그런 어르신들에게는 일상을 탈출해서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리는 그 자체가 여행일 테니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나와 함께 있는 관광객들의 모습과 대학생 때 뵈었던 관광 버스의 어르신들이 오버랩되는 듯하다. 물론, 그분들의 관광 행태가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내 안에 '저 사람들의 삶의 궤적 안에는 내가 모르는 맥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여지는 생기게 되었다. 이 작은 여지 때문이었을까. 시끄럽게 사진을 찍어대는 아저씨에게서 그동안은 못 봤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진 한 컷을 선물해 주고 싶어 동분서주하는 아들내미의 미소가 그제서야 보였다.

 




 아침 일찍 청수사를 방문한 건 신의 한 수가 분명했으나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했다. 청수사 곳곳을 충분히 돌아다니며 운치를 맛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청수사 밖 상점거리로 향했는데 웬걸, 문을 열지 않았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며 간식들은 몰라도 찻집은 문을 좀 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문을 연 상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치명적인 단점이 주는 아쉬움도 잠시, 아직 잠을 깨지 않은 일본 느낌이 가득한 고택들과 상점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올 때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던 이 거리를 동네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거닐다 보니 내면 깊숙한 데서부터 만족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여행자를 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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