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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소시민 Jul 27. 2023

교토에서 저녁을

..... 이제는 우리집 근처, 놀이터를 품은 공원에서 저녁을

 교토 여행을 다녀온 직후부터 그 다음 여행을 위해 내가 쉴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 계산하는 동시에 비행기와 호텔 예약 앱을 들락날락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렸다. 다음 여행은 관광보다는 여행에 가까운 여정이 되게 하리라 다짐을 하면서 일정을 짰다가 엎었다가를 반복하는 것도 중요한 하루 루틴이 되었다. 다음 여행에 집착하는 것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니 왠지 서글프다.




  오랜만에 정시에 퇴근해서 집에 왔다. 동네 커뮤니티를 겸하는 카페에 들어가 게시글들을 보는데 ‘오늘은 일곱 시 반까지 가게 엽니다. 김밥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하루 한 끼만 제대로 먹자는 주의여서 저녁은 넘기려고 했는데 김밥이라는 두 글자가 마음에 콕 박혔다. 소풍 갈 때 먹을 수 있는 엄마표 김밥. 비슷한 김밥이지만 집마다 김밥의 맛이 다르고 모든 아들내미, 딸내미들에게는 자기 엄마가 해준 김밥이 ‘세상 제일 맛있는 김밥’이었다. 사진에 올라온 김밥을 보니 여느 김밥집에서 파는 김밥 느낌보다는 손 큰 엄마가 해준 김밥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맛보기 어려워진 엄마표 김밥을 떠올리며 부랴부랴 지갑을 챙겨들고 나간다. 따르릉~ 전화를 걸어서 얼마가 남았는지 알아보니 네 상자가 남았다고 한다. 바로 두 개를 예약하고 걷기 시작한다. 원래는 사들고 집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김밥집 근처에 와서 느꼈다. 날이 너어무~ 좋다는 걸. ​바람은 선선하니 더위를 진정시켜주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여름이라는 걸 잊지 말라며 적당하게 습한 공기가 감돈다.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데 마음 급한 달은 벌써 나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저녁은 김밥. 소풍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돗자리도 하나, 얇은 책 한 권 챙겨 올 걸 그랬네. 김밥 들고 놀이터를 품은 공원으로 가자.’

 마음을 먹는다.


​ 김밥집에 가니 ^^ 인상 좋게 생긴 큰누나 뻘 사장님 두 분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사실 여긴 김밥집이라고만 하기는 묘한 곳이다. 반쪽은 편의점, 반쪽은 샌드위치 가게, 이 와중에 샌드위치 사장님은 김밥을 말고 있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김밥만 받아들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 사이 말이 오간다.


 “아니,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게다가 김밥에 남자들이 더 열을 올린다니깐. 호호호호”

 “그러게 말야. 나는 샌드위치 그것도 치아바타 전문 샌드위치 가게 사장인데 말이지.”

 ”네, 여기 카페 보고 얼른 달려왔죠. 김밥이 너무 먹음직스러워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요 앞 공원에서 소풍 겸 먹으려구요.“

 “어쩜, 마침 잘 됐네, 잘 됐어. 여기 김밥이 참 맛있어요. 직접 집에서 키운 채소들로 만들었다니깐. 호호호호“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 가게가 원래 샌드위치 파는 가게인데 말야.”

 “그런데 이 한 공간에 어떻게 두 분이 같....이 계시게 된 거예요?”

 

 샌드위치 사장님 말씀을 들어 보니 그 전 가게가 너무 더워서 원래부터 친했던 편의점 사장님과 합치기로 하셨단다. ‘원래 우리 둘이 친해, 호호호호~’ 편의점 사장님의 기분 좋은 말씀이 톡, 하니 귀에 박히면서 마음 한편이 몽글몽글해진다. 김밥에는 역시 아메리카노. 보통 뜨거운 커피를 먹지만 오늘은 사이다를 대신해야 하니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 편의점 사장님의 ‘어쩜, 마침 잘 되었네~‘ 소리가 한 번 더 기분 좋게 귓가에 울린다.


 “혹시 괜찮으시면 좀 찐하게 주실 수 있으실까요?”

 “어쩜, 정말 잘 됐네. 그렇게 해줄게요. 보통은 이렇게 진하게 잘 안 먹는데 진하게 먹어도 괜찮아요?”

 옆에서 김밥을 마시던 사장님도 말씀을 보태주신다.

 “와, 부럽네. 나는 이 시간에 커피 마시면 잠 절대 못 자는데.”

 “하하핫. 저는 감사하게도 밤 열한 시에 커피를 마셔도 잠을 잘 잔답니다. 진한 커피 정말 감사해요.”

 “진짜 잘 됐다. 얼음 몇 개 더 얹어줄게요.”


 이런 소소한 말들이 핑-퐁-핑-퐁- 오가는 어느새 김밥과 커피 한 잔이 내 손에 들려 있다.



어느새, 여기가 ‘우리 동네’가 되어가나 보다.


 적당하게 자리를 잡아 김밥을 풀어놓는다. 아, 저녁으로 향하는 이 시간대와 잘 어울리는 ‘브루노 메이저’의 음악을 틀어놓는다. 김밥 한 알을 입에 쏙 넣어본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역시, 집밥 느낌이 가득하다. 진하게 내려주신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니 딱 좋다. 사진에는 보기 좋으라고 김밥이 한 줄이지만 사실은.... 두 줄을 샀다. 다이어트는 내일의 나에게 맡겨두고 오늘의 나에게만 집중한다. 그리고 두 줄이 기본이지, 김밥은.

 저기서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처음 여기로 이사 와서 본 이 공원은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못난 공원이어서 정이 가지 않았다. 운동 삼아 걷기 위해 지나갈 뿐이었다. 호수 대신 유수지만 있는데다가 나무들이 잘 자라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공원일 뿐이었다. 그러던 공원이 어느 순간 어린이들을 위한 근사한 놀이터를 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까르르 기분 좋게 울린다. 게다가 오늘 다시 보니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 저녁이면 돗자리 깔고 앉아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으면 좋을 곳들도 많이 보였다. 앞으로도 날이 좋은 여름날 늦은 오후에는 이렇게 동네 샌드위치 가게에서 ‘김밥’ 두 줄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나와봐야겠다. 아니다, 다음에는 김밥 한 줄과 사장님이 잘하신다는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사와야겠다. 물론, 그 샌드위치 가게가 오후 네 시면 문을 닫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러고 보니 오늘은 기분 좋은 행운이 따라주었나 보다. ​


 어느새 ‘우리 동네’가 되어가는 여기에서 교토에서 꿈꾸던 ‘여행’을 맛본다. 그럴싸한 여름 저녁.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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