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적 소시민 May 08. 2024

교토에서 저녁을, 또?!

똥멍충이, 네, 그게 바로 접니다.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나 부지런히 씻고 공항을 향해 갔습니다. 난 실수하는 법이 없는 J. 비록 파워 J라고 할 수는 없으나 J는 J.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랬지요. 그래요. 네, 맞아요. ㅡㅡ;; 여권 안 챙겨 온 그 똥멍충이가 바로 접니다. 정확히는 만료가 된 옛날 여권을 가지고 당당하게 비행기를 타려고 했던 그 똥멍충이. 가는 길 중간에 알아챈 것도 아니고 우아하고 엣지 있게 온라인 티켓을 보여준 후 여권을 보여주는데, 공항 직원이 매우 당황해하며 다른 여권을 요청하면서 알게 된 거였죠.


 “만료된 여권은 폐기해 드릴까요?”

 “아니요. 제가 다닌 곳들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제가 보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 라고 말하는 과거의 나를 찾아가서 등짝을 후려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저는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어엿한 성인 아니겠습니까. 감사하게도 막 화가 나진 않았습니다. 일단, 긴급 여권을 알아보는데 관련 부서가 9시에 여는데다가 긴급 여권은 인천 공항에 가야 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주차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9시 비행기 표는 날리고 오후 비행기로 다시 예약을 해야겠다, 생각하는 중에 예약 변경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체크인 취소하고 예약 시간을 변경했습니다. 다행히 저어어어어엉말 적당한 오후 비행기가 있더군요. 부랴부랴 그 시간으로 옮겨놓고 긴급 여권을 신청하러 갈지 아니면 다시 서산으로 갈지 고민했습지요. 시간 여유 있으니 그냥 서산으로 가자고 결정하고 주차장으로 뛰어갑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결정이 꽤 좋은 결정이었음을 알았지만 차를 몰고 막히는 도로를 뚫고 서산으로 가는 중에는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요. 긴급 여권 만드는 비용이나 서산에서 공항까지 드는 주유비나 또이또이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것저것 생각하니 똥멍충 비용, 꽤 많이 쓴 셈입니다.


 공항에서 서산까지 약 세 시간. 11시 조금 넘어 도착해서 들고 가야 할 여권을 챙깁니다. 냉장고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아그작 베어 뭅니다. 일단, 헛웃음이 나옵니다. 누군가가 이와 같은 실수를 하면 겉으로는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나는 달라’를 외치며 어떻게 저렇게 준비성이 없는지에 대해 혼자서 곱씹었던지. 그걸 생각하니 화가 나기보다는 함부로 생각하고 판단했던 나 자신이 다소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여권 안 가져왔던 제자 녀석들, 친구들, 선배님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놀라운 지경에 다다르게 됩니다.


 ‘아,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을 보면 다르게 보이겠구나. 다는 아니어도 정말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겠구나.‘




 여행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하면서 터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든 나를 조금 더 넓고 넉넉하게 만듭니다.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권을 잘못 들고 가면서 겪었던 경험들은 어찌 됐든 아프지만 나를 조금 더 넉넉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지경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사람들을 보면서 ‘그럴 수 있는 거였음’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인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조금 더 품이 넓은 사람으로 늙어갈 기회를 얻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추신.

워워, 아무 일도 없었어. 넌 원래 오후 4시 반에 가기로 한 거였잖아. 넌 아침에 비행기 표를 끊은 적이 없어. 그치? 짜증 내지 말고, 워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안 났던 건 아닙니다. ^^ 왜 이렇게 짜증이 올라오나.... 아무리 주문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고, 너는 아침에 비행기 표를 끊은 적이 없다고 되뇌었지만 짜증이 쉬이 내려가지 않더라구욥. 혹시.. 배고파서 더 짜증이 나나 싶어서 ㅡㅡ;; 오코노미야끼와 중국식 만두를 먹었더니 뭐, 싹은 아니지만 까짓것 별일 아닌 게 되더라구요. 식사 한 끼에 감춰질 짜증이었던 거지요.


 그게 참 고마운... 여행 첫날이었습니다.  ^^

 

모두들, 여권 챙기십시오!
여권 만료 날짜 꼭 확인하십시오!!
혹시라도 만료된 여권을 추억 삼아 갖고 계시다면,
반드시 겉표지에 대문짝만하게 ‘만료 여권’이라고 써두십시오.
아예!! 새로운 여권과 같이 놓지 마십시오!
꼭!! 꼬옥!! 약소오오오옥!!!!!  




 

매거진의 이전글 교토에서 저녁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