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으로 여유로워지기
웬만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 한 잔을 내려마신다. 그런데 요즘처럼 의욕이 없는 날이면 그냥 차를 몰고 나간다. 일찍 문을 여는 카페에 들어가서 직접 내려주는 커피 한 잔의 호사를 누린다.
‘산미가 튈 수 있어서 녹차로 만든 휘낭시에와 함께 드렸어요.‘
아직까지는 초록빛을 머금은 나무들과 논밭이 눈앞에 그럴싸하게 펼쳐져 있다. 이 정도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도, 내 삶은 풍족하리라, 마음먹는다. ’의욕없음‘이 마음에 차곡차곡 먼지처럼 쌓이는 오늘. 화면에 활자들을 채우며 문득, 교토에서 마셨던 커피들이 생각났다.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세요.
이번 여행에서는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가보기가 목표였다. 혹은 가더라도 가급적이면 내 걸음으로만 가보기. 그렇게 교토역에서 시작해서 걷기 시작했다. 숙소를 나와 계속 걷다 보니 청수사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어라? 호텔에서 청수사가 이렇게 연결된다고?’ 신기한 경험이다. 지리에 약한 나는 장소와 장소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저 가야 할 곳에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니 숙소와 관광지 사이, 관광지와 관광지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걸 걸음으로 채워가다 보니 ‘지도가 밝아지는 기분’이다. 아, 이렇게 가면 청수사가 나오고 청수사에서 또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신사가 나오는구나. 그동안은 별개로 존재했던 곳들이 내 걸음을 통해 ‘연결’되는 경험을 하다 보니 왜 사람들이 느긋하게 거닐면서 여행을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된다. 장소와 장소를 빠르게 이동하는 자동차의 발전이 오히려 여행의 묘미를 망쳤다고 통탄하던 선배들과 문인들의 마음이 이제사 이해가 간다. 많은 곳을 가볼 수 없으나 그동안 별개로 존재했던 곳들을 내 걸음을 통해 연결하는 재미가 상당하다. 그리고 우연이 만들어준 길이 꽤 그럴싸한 선물을 남기곤 한다.
청수사 올라가는 길 앞에서 나는 청수사가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평범한 일본의 골목길이지만 나에겐 일상이 아니라 모험이다. 골목에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빵 굽는 냄새와 커피를 볶을 때 나는 기분 좋은 쓴 향이 코끝에 머문다. 40분가량 걸었으니 커피 한 잔 하면 좋겠다 싶어 들어갔다.
카페 안은 이미 만석.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카페의 사장님은 혹시 괜찮다면, 바 앞에 의자를 하나 둘 테니 거기 앉으면 어떻겠냐고........ 말씀에 준하는 무언가로 의사를 전달해 주셨고 나는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참고로, 나는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사장님이나 나나 정말 영단어 몇 개로 이런 놀라운 소통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소통은 아주 명확하게 이루어졌다. 부산스럽게 의자를 빼서 자리를 마련한 후 내게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앉으려고 했던 찰나, 그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외국인 손님 두 분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테이블을 양보해 주신다. 사실 있으려고 했다면 충분히 더 앉아서 쉴 수도 있었겠으나 자신과 같은 여행자가 이곳을 나가지 않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렸으면 하는 의도가 분명했다.
“아, 저기에 앉으시면 되겠어요. 괜찮으니까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세요.“
“두 명이 앉을 자리인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편하게 자리에 앉으신 후 주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두 명의 손님이 오면 제가 자리를 바꿔 앉을게요. “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충분히 누리다 가시면 됩니다.”
단언컨대 우리는 매우 짧은 영단어 몇 개로 저런 따스하고도 훌륭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커피 한 잔과 단팥잼을 곁들인 토스트를 주문했다. 청수사에서 가까운 카페여서 그런지 외국인 손님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옆 테이블에는 독일에서 온 부부가 있었는데 짧은 영어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캐논 카메라가 신기했던지 카메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현재 세계 일주를 겸해서 부부가 함께 여행 중이고 바로 두 주 전에는 우리나라 서울과 전주를 여행하고 일본 교토로 왔다고 한다. 어색한 대화였지만 우리는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고 우리의 엉성한 대화는 따스했다. 그럼에도 내가 만약 영어를 잘했다면 우리의 대화가 조금 더 윤기가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감돌았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손님들이 도착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독일인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건넸고 그 자리에는 방금 온 손님들이 앉았다. 카페에 새로 손님들이 도착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 자리를 마련해 주고 떠나는 발걸음과 새로 도착한 발걸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이젠 내 차례가 되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자리가 모두 꽉 찼습니다. 드시고 가실 거면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이런 뉘앙스의 말이 들리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 자리 있어요. 여기 앉으세요!“
자리를 정리하고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Wishing you a great day!를 흘려보낸다.
일상을 떠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일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이라는 땅에서의 일상은 꽤나, 바쁘고, 여유가 없다. 정해진 일의 루틴들을 수행하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만으로 이미 내 기력은 다 소진된다. 여행이라는 ‘파격’은 결국 기존의 모든 루틴을 깨고 다시 시작하는 일종의 레고 놀이와 같다. 문득, 다시 한번, 내 발걸음이 내딛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그러다, 문득 들른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의 호사를 누리고 싶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