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업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적 소시민 May 12. 2024

시화로 수업하기  

아날로그 정서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1학기 수업 중 가장 행복한 수업을 꼽으라고 한다면 시를 창작하고 시화로 표현하는 수업일 것이다. 완성된 시화는 학교 축제 전에 전시되고 아이들은 물론 졸업생들과 부모님들 모두가 감상한다. 따로 교실에 전시하지 않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전시해 둔다. 축제 전날 모든 학년의 시화가 다 전시되면 나는 축제 당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들의 시화와 만난다. 물론 아이들의 시화를 평가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냥 아이들이 시를 통해 건네는 이야기들을 가장 조용한 시간에, 가장 먼저 듣고 싶어서가 더 크다.


홀로 머물기


 자고로 예술은 시간을 낭비(?)할 줄 아는 용기 안에서 나오는 법. 날이 적당한 어느 날이 되면 아이들을 교정으로 내보낸다. 약속은 딱 하나. 홀로 머물거나 걷기. 뭐, 그러다가 마음이 원하면 무언가를 끄적이기. 이럴 땐 우리 학교가 시골인 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아이들을 보내놓고 나면 나는 걷고 있거나 혹은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녀석들을 찾아 사진 한 장을 찰칵, 찍는다. 고3 수업이 아니면 매번 시화 수업을 하고 첫 시간은 무조건 아이들을 내보내는데 어쩜.. 해가 갈수록 아이들이 머무는 공간이 다채로워진다. 올해는 한두 녀석은 도무지 찾아내질 못해서 교실 앞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다양한 시를 맛본다.​ 우리 반 녀석들은 이미 한 번 경험해서인지 익숙하고 편안하게 수업 안으로 들어온다. 수업에서 만나는 녀석들은 사뭇 달라진 교실 분위기에 상당히 놀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색다른 수업이 꽤나 의미 있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은 시를 짓기 시작한다. 한두 주 정도가 지나면 시에 어울리는 시화를 구상한 후 작업에 돌입한다.


예술은 시간을 낭비(?)할 줄 알아야 하지만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건 결국 마.감.일.   


 자, 이제는 미안하지만 아이들을 독촉할 때다. 결국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데 원동력이 되는 건 역시, 마감일과 마감 독촉이 아니겠는가. 아싸! 올해는 한 녀석도 늦지 않고 작품을 제출해 주었다. 그렇게 제출한 작품을 코팅하고 학교 교정에 전시한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화 수업의 마지막이 시작된다. 준비물은 펜 하나와 받침대 하나.


 “자, 이제 여러분들이 낳은 시는 물론 여러분들의 선배와 후배들이 낳은 시들이 걸렸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시를 감상해 주세요. 분명 지난번처럼 여러분들을 부르는 시가 있을 겁니다. 그 시 앞에 머물러서 충분히 시를 감상해 주세요. 그리고 그 시와 만나서 드는 생각을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주세요. 혹은 그대들이 아는 시인이거든, 그 시인에게 응원 메시지를 던져주셔도 좋습니다. 시 내용을 가리지 않는 선에서 붙여주시되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놀림은 안 됩니다. 그것만 지켜주세요.”


 아이들은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부르는 시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자신만의 방식대로 답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풍성한 수다가 무르익어가면 시화에는 알록달록한 잎사귀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적당하게 부는 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이는 잎사귀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다. 아이들이 건네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는 것은 시를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선물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또 다른 소통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선배와 후배들은 물론, 부모님들도 이 소통에 참여해 주신다. 여기에 한 선배 선생님은 시화가 시작되는 곳에 펜과 포스트잇을 잔뜩 가져와 달아 주셨다. 바람이 불 때마다 시화에 달린 알록달록한 댓글 잎사귀들도 함께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올해는 하나를 더 시도해 본다. ‘시인의 목소리 초청해 보기.‘

 우리 반 친구들이 쓴 시들 중에서 직접 시인의 목소리를 낭송해 주는 시를 들어보고 또 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워낙 자기표현을 잘 안 하는 녀석들인지라 이게 될까 싶었는데 웬걸. 아이들은 자신의 시를 멋지게 낭송해 주었고 또 친구들의 질문에도 진지하게 답해 주었다. 그 진지한 답을 들으면서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자신의 시를, 친구들의 시를 선배와 후배들의 시를 누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시를 쓰는 것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거였네요.
누군가가 내 시를 읽고 다시 답해 주는 과정이 정말 설렜어요.
행복하네요.


 시화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한 녀석이 조용히 다가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시를 스는 것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거였네요. 누군가가 내 시를 읽고 답해주는 과정이 정말 설렜어요. 저 정말 행복했어요.”


 이 말을 들은 나 역시 무척이나 행복하단다. ^^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을 존중하도록 노력할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