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 말고 ‘우리집’

아버지. 우리 아부지

by 이기적 소시민

한 달 전. 으레 그러하듯 좋은 사진전이 없나 찾아보다가 이경준님의 사진전이 열린다기에 클릭해 보았더니, 부산. 아, 부산은 너무 멀다. 당일 정도밖에는 시간이 나질 않으니 곧 포기하고 만다. 그러다가 요시고의 전시회가 서울역 ‘그라운드시소 센트럴’에서 곧 열린단다. 벌써 두 번째 전시회라고 하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었다. 검색해 보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 가자. 그렇게 나는 서산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서울역. 전시회에 들어가기 전, 바나나 하나와 커피 한 잔으로 요기를 하면서 다음 일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찾은 곳이 서울역에서 염천교를 지나... 염천교... 염천교! 그래 염천교. 기억나. 여기.... 양화 거리, 수제화 거리.




맛있냐?


내가 고등학생일 때였다. 고1이었나 아니면 고2였던가. 날이 추었던 것으로 보아 겨울 방학을 얼마 앞두지 않은 겨울의 초입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뜬금없이,


“이번 일요일에 ㅁㅁ이가 아버지 좀 도와줄래? 서울에 좀 가자.”

“아 네.. 그럴게요.”


마지못해 답을 한다. 그래도 내가 첫짼데 가야지. 첫째라는 의무감에 차마 거절은 못하고 그렇게 황금 같은 일요일 아침,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따라나섰다고 했지 내가 기분 좋게 헤헤거리며 간다고는 안 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그저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서울역을 갔던 기억만 있었다. 서울역에서 아버지와 나는 추운 바람을 뚫고 걷기 시작했다.


“저기가 염천교다. 사람들이 저기가 거지가 사는 다리라고 하는데 거기는 여기가 아니고 다른 데지. 아암. 그럼. 저기는 아부지처럼 수제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저기를 사람들은 수제화 거리라고도 하고 양화 거리라고도 한다. 자, 가자.”


아버지는 지역에 대한 지식이나 전설 등에 빠삭하셨다. 경주가 충청도 어드메인 줄 알았던 나와 달리 아버지는 내가 어디로 출장을 간다고 하면 그 지역을 당신께서 언제 가보셨는지부터 시작해서 그 지역에 얽힌 전설, 유명인, 유명한 음식, 사찰 등에 대해 좌라락 읊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염천교에 대한 아버지의 해설은 이 정도면 짧은 것이다. 아니, 그 길던 아버지의 해설 중 내 기억 속에 남은 게 저게 다여서 짧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근 30년이 다 지난 지금, 염천교 세 글자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게 수제화 거리, 양화 거리라니. 어쨌든 당시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정말로 무수히 많은 양화점과 수제화 가게를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피혁점에 도착했다. 사실, 거기서 뭘 어떻게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아버지의 가게에서 나던 그 가죽 특유의 냄새가 여기서도 난다는 것과 ‘피혁’이라는 이름이 꽤 깊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가게에서는 맡을 수 있었던 특유의 가죽 냄새가 왜 그렇게 반갑던지.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게 당시에는 왜 그렇게 안심이 되던지.


당시에도 아버지의 수제화는 그렇게 잘 팔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구두는 당시 유행과는 거리가 멀었고 금강제화니 에스콰이아와 같은 구두 회사가 오히려 더 고급스럽게 사람들의 눈길을 잡고 있었던 때였다. 수제화를 만들 수 있었던 아버지의 기술은 쓸모가 점점 없어지고 있었고 그저 하루 몇 번 구두를 고치러 오는 손님들이 부쩍 늘어가고 있었다. 그런 찰나,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아직 아버지의 때가 꺼지지 않았구나 싶은 안도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뭔가 많은 걸 사지 않으셨다. 빈 손으로 돌아왔던가 아니면 아버지 혼자서 들고 와도 충분한 비닐 봉투 하나 정도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 검은 비닐 봉다리를 내가 들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 나를 이끌고 아버지는 더 깊은 골목 어딘가로 들어가셨다. 삼시 세 끼를 꼭 챙겨 먹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고 일요일 아침 식사는 이 염천교 근처 골목 식당에서 예배와 같이 이루어질 터였다. 거기서 시킨 것은 ‘콩나물북엇국’. 얼마나 뜨겁게 끓였는지 밥과 함께 담겨온 국그릇 속에서는 뽀얀 국물이 여전히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추운 날씨, 안경은 금세 하얗게 김이 서렸다. 후루룩, 후루룩. 쩝쩝쩝. 하아.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오로지 아침 식사라는 경건한 의식 하나만이 있었을 뿐이다. 의식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가 나에게 물으셨다.


“맛있냐?”

“아빠, 맛있어요. 저 이거 처음 먹어봐요. 국물이 진짜 시원하고 맛있어요.”


그렇게 의식을 끝마치고 우리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가끔씩, 나는 처음 먹었던 해장국으로 나왔던 콩나물북엇국이 생각난다.




요시고의 전시회를 흠뻑 보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침 가보고 싶었던 커피숍이 염천교를 건너면 금방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참 신기하다. 딱 한 번 아버지와 같이 갔던 그 길이 내 몸에 아로새겨져 있었나 보다. 서울역에서 아버지와 걸었던 그 길을 나도 모르게 걷고 있었다. 주변 풍광이 과거 그때와 같을 리 만무하나 내 발바닥이 걷고 있는 이 길은 변하지 않았다. 길은 변하지 않았으나 시대가 바뀌었고 이 길 위에 세워진 공간들은 노쇠해 가고 있는 듯했다.


‘분명 이 근처에 그 피혁점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갔던 그 피혁점의 위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와 거닐었던 곳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이곳이 예전에는 다 양화점이며 피혁점이었을 텐데 지금은 많이 적막해졌다. 그 적막함도 반가워 오히려 더 천천히 걸었다. 내 아버지와 같은 기술을 지니는 분들이 계시는 곳. 여전히 그분들이 누군가의 구두를 직접 만들고 계시는 이곳이 적막하지만 반가웠다. 반가웠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통해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나는, 염천교 건너 수제화 거리에서 풍기는 가죽 냄새를 통해
아부지의 가게를 회상한다.

이제 염천교를 건널 차례. 여기가 이렇게 작았었던가. 그 다리를 건넜더니 시각보다 후각이 먼저 반응한다.

아버지의 가게 냄새. 와아. 가죽 냄새다. 정확히는 가죽 냄새와 함께 밑창을 붙일 때 사용하는 본드 냄새도가 합쳐진 냄새다. 많이 작아졌지만 여기는 내 아버지의 가게 냄새가 여전히 남아있는 곳이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과자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리고 나는, 염천교 건너 수제화 거리에서 아부지의 가게를 회상한다. 이걸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다지. 냄새는 수집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부지의 가게 냄새와 거의 같은 냄새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게 고무적인 일이라고....?’


내가, 아버지와 이렇게 친밀했던가. 오히려 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쪽에 가깝지 않았던가. 그런데 난 왜 그런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여기까지 왔던 걸까.

나이를 먹어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보니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를 닮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발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오늘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걸으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늘었다.


당시 아버지는 굳이 내 손이 필요치 않으셨다는 거. 아버지는 그저 다 큰 아들과 함께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서울 수제화 거리를 지키는 아버지의 친구들 혹은 아버지와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저 '내 아들' 자체를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이고 그런 아버지는 서울 가는 그 길을 혼자가 아니라 아들과 함께 오가고 싶으셨던 것이다. 누군가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물을 수도 없고 어떻게 그렇다고 확언할 수 있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것 같다'를 넘어 '그렇구나'라고 여겨지는 이 깨달음은 확실하다. 딱히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나 내 생각이 맞다. 내 40년 무형의 '우리집'으로 함께해 주셨던 '우리 아부지'의 아들이기에, 이 생각은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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