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나타나 골치 아픈 모든 일을 처리해줬으면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아무리 해도 일이 해결되지 않고 진척이 없으며, 그래서 손도 대기 싫은 그런 일들. 하지만 초월적인 존재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경우는 일상생활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개연성과 인과성을 고려하지 않고 마지막에 갑작스럽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고대 그리스극에서 자주 사용하던 극작술이다. 초자연적인 힘이나 존재, 혹은 등장인물의 각성 등을 통해서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를 결말로 이끌어하는 수법인데, 이같이 갑작스러운 사건 해결과 결말은 독자로 하여금 허무하게 만들고 충분한 설득력을 주지 못한다. 글쓰기에 좋은 팁을 알려주는 한 인스타그램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경계하는 방법으로 ‘최소한의 당위성’을 부여해야 함을 강조했었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부분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될 수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결말은 설득력을 획득하기 어렵고 독자들이 납득하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적절한 당위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극작술에 불과한 명제이지만, 이는 충분히 우리 삶에 적용이 가능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갑자기’ 좋은 일이 생겨 인생이 행복해진다거나, 반대로 ‘갑자기’ 안 좋은 일이 생겨 불행해진다거나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적 결말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다. ’갑자기 나한테 이런 좋은 일이 생긴다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갑자기 생기는 거야?’
그렇다면 급작스레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당위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우리네가 지내온 생활 속에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을, 어제를, 오늘을 어떤 방식으로 삶을 축적해왔느냐가 발생하는 결말에 대한 당위성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나 지침에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라’와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항상 바라고 있다. 당장 나만 해도 ‘누군가가 나타나 오늘 해야 할 일들은 모두 처리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방금 전까지도 가졌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국에는 ‘내’가 처리해야만 모든 것이 오늘 안에 끝나고 하루가 완성된다는 것을. 힘들고 피곤한 일상 속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꿈꾸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다만, 나만 쓸 수 있는 내 삶의 이야기가 갑자기 A에서 Z로 바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주 허무함을 인식해야 한다. 삶 속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당위성은 ‘본인’에게 있다. ‘나’라는 독자가 충분히 설득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좋은 근거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