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그 기록을 본격적으로 남기기 시작한지 겨우 반년보다 조금 더 지났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과 기분을 에세이로 남기는 것도 같은 시기에 시작했다. 초기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열심히 읽고 썼다. 블로그에도 남기지 못하고 그저 일기장에만 숨겨둔, 어디 내놓긴 부끄러운 글들도 제법 된다. 글을 잘 썼다든지, 글이 아쉽다든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 또 글을 써냈구나' 하는 안도감이 주는 뿌듯함을 위해 지금까지 끄적여 왔다.
갓 붙인 모닥불이 뒤덮일 정도로 너무 많은 장작을 쏟아부은 탓일까. 불은 꺼지고 불티만 날리고 있었다. '글'에 대한 열정이 처음의 그것과는 다름을 나는 이미 느꼈다. 지친 자아를 스스로 토닥거릴 방법으로 시작한 글쓰기는 어느샌가부터 사람들의 '팔로우'와 '좋아요'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블로그 방문자 수와 팔로우 수가 늘어나긴커녕 줄어드는 것을 참을 수 없고, 쓴 글과 읽은 책이 없음에도 무언가를 게시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괴롭혔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렇게 슬슬 책과 펜을 못 본척 하기 시작했다. 쓰지 않고, 읽지 않는다는 불편한 사실을 누구에게라도 들킬세라, 사실 들켜도 상관은 없지만, 가슴한켠에 꽁꽁 싸매 숨겨두었다. 머리와 손이 할 일을 잃으니, 자연스럽게 눈이 유흥을 찾았다. 퇴근 후에 책보다는 유튜브를 보았고, 펜보다는 게이밍 마우스를 잡았다. 그러기를 며칠 반복하다 보니 언제 글을 썼냐는 듯 무미건조한 삶에 익숙해져갔다.
"요즘은 예전만큼 열심히 안쓰네?"
쿵했다. 심쿵한게 아니고 진짜 '쿵'했다. 아내는 별 생각없이 뱉은 말이었겠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사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괜스레 울컥해서 외쳤다. "쓰..쓸거다!" 비루하기 짝이없는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고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게임 속 마우스만 휘적거렸다.
다음날부터 니체가 한 말들을 엮은 책을 읽기 시작하며 마음을 다 잡았고, 다시 써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새로운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글쓰기에 대해 제법 직업의식을 가지게 해줄 그런 동기. 브런치 작가 지원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원래는 '브런치' 라는 플랫폼도 블로그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 딱히 지원하고자 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다.
브런치 작가에 지원했다가 떨어져 수차례 응시했다는 블로그 글들이 많이 보였다. 막상 지원하려니 글쓰기 실력이 탄로날까 걱정부터 앞섰다. '나는 글을 잘쓰는가' 라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해' 라고 반복해서 답하고 나서야 브런치 작가 지원을 마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브런치 작가에 한번에 선정됐다. 이 때 깨달았다. 글은 잘써서 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해서 쓴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통함을.
어떤 것을 시작했지만, 수단과 목적이 도치되어 의욕을 잃어버린 경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느껴보았을 감정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흔히 슬럼프라 부를 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온다. 어떤 식으로든 온다. 중요한 것은 이 굴곡진 녀석과 함께 침전해 가라앉아 있기보다는, 바닥을 박차고 위로 올라갈 계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든 도전해보자. 그것이 브런치 작가 지원이든, 공모전이든, 독서모임이든. 색다른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예전보다 더 열심히 쓰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