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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Sep 15. 2015

신이 부는 조소의 휘파람에 맞추어 추는 불안의 춤

『불안의 글』, 페르난도 페소아, 봄날의 책, 2015.


'신이 부는 조소의 휘파람에 맞추어 추는 불안의 춤'

- 『불안의 글』, 페르난도 페소아, 봄날의 책, 2015.



Fernando Pessoa, 1888-1935.




* 책, <불안의 글>에 대해서 


 <불안의 서>가 출간된 지 1년. 한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입을 통해 '작가들의 책' 이라 전해지던 페르난두 페소아의 산문은 어느샌가 책 꽤나 읽는다는 이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불안의 서>가 출간될 즈음, 100쪽 가까운 페소아의 원고가 더 있었단다. 그러나 800쪽이 넘는 <불안의 서>에 함께 담기엔 책의 물성적인 측면에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 같아 출판사 한 쪽에 고이 보관해두었다고. 그리고 이 원고는 지난 1년 간 작가, 매체, 독자의 사랑을 받은 <불안의 서> 출간 1년을 기념하여 펴내게 된 100쪽 분량의 글, <불안의 글>이 된다.






* 잘 읽지도 못하면서


페르난두 페소아의 산문이란다. 번역은 소설가로써의 입지를 굳건히 해내고 있는 배수아. '페수아 쓰고, 배수아 번역하다.' 이토록 질긴 고유명사의 조합이라니. 


 <불안의 서>는 다양한 분야의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나도 언제고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다. 그러나 책의 두께가, 또 가격이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위에 적었듯, 페소아의 100쪽 분량의 글이 <불안의 글> 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으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문했다. 아무 책이나 무턱대고 살 수 없는 학생 신분이기에 <불안의 글>로써 페소아와 그의 작품을 재단해보겠다는 (지금 생각하자면 참 부끄러운) 의지의 행위였다. 


 며칠을 기다려 받아본 <불안의 글>은 표지만 보고 있대도, 당시 읽고 있던 지리한 묘사 투성이의 소설을 덮게 만들만큼 매력적이었다. '불안' 이라는 키워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을만큼 핫(?)한 단어인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현대인이 앓고 있다는 그 불안이 얼마나 허울없이 모호하기만 한 것인지, 어쩌면 그저 '힘들다'는 표현을 굳이 '불안'이라는 단어로 별 거리낌없이 무심코 치환해버린 것은 아닌지 -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페소아의 불안은 그 태가 명확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애쓰지 않는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곧 불안에 대한 완전한 인정의 행위다. 때문에 그런 그에게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위로가 아닌 쾌감이다. 가령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나에게 고통이다. 타인들을 나는 내 안에 지고 간다. 심지어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강요당한다. 혼자 있을 때조차 군중의 무리가 나를 에워싼다.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달아날 방법이 없다. (우연의 일기 中)' 

위 문장은 어떤가. 온갖 연결망들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선 도통 내뱉어볼 수 없는 말이다.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는 타인에 대한 염증, 결국 그렇게 밖에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이 언젠가 생각해봄직한 순간의 단상을 적확하게 글로 풀어낸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쾌감이 된다. 맹렬한 속도로 도로를 역주행하는 듯하고, 거대한 불안에 맞선 광기어린 춤짓을 보는 듯하다. 


 우리의 일상은 언젠가부터 다소 급급해졌다. 자신을 드러내기에, 관계맺기에, 열심히 살고 있어 보이기에, 그리고 그런 삶을 합리화시키기에 까지. 급급함이 널려있다. 페소아의 산문은 그런 급급함으로부터 벗어나 단 하나의 삶, 스스로가 주인인 바로 그 삶을 살아갈 것을 강경하게 종용한다. 

우리는 선하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다. 우리의 본성이 그 반대라는 말이 아니라, 이쪽도 저쪽도 아니라는 뜻이다. 자비는 자연 상태의 영혼이 갖는 민감함이다. 우리는 자비가 타인의 마음과 사고방식에서 발생할 때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그것을 시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우리의 할 일은 오직 단 하나,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뿐이다. (차이의 선언 中)  


 그에게 위안은 어디에 있는 걸까. 도처에 널린 힐링의 요소들도 그에게는 조소거리에 불과해보인다. 

오직 밤에만, 밤에만 나는 나 자신이며, 다른 모든 사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잊힌 존재로, 버려진 존재로 있을 수 있다. 현실과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은 채, 그 어떤 세상의 소용과도 무관한 채, 나는 오롯이 나로 있는 나를 발견하며, 위로를 얻는다. (묵시록적인 느낌 中)


우리 인생에는 조금 더 많은 밤들이 필요하다. 세상 모든 소용과도 무관해지는, 수 십개의 페르소나를 벗고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밤의 시간 앞에서 조금 더 자신다워질 수 있다고 페소아는 말한다. 


 100쪽 분량의 글로는 한 인간의 사상, 그 편린조차 들여다보기 힘들겠지만 내게 이 산문은 그야말로 얍도적이기에 이 한 권의 책이 그의 전부라고 믿어진다. 책을 덮은 후 나는 또 다시 그가 쓴 다른 책들을 탐닉하고 있다. 


페소아의 생애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에게 보내는 찬사를 분명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달갑지 않음과는 상관없이 나는 기쁠 따름이다. 페소아를 알고, 아직 읽을 그의 글이 제법 많이 남았다는 점, 온통 '아름답고도 무용한' 그의 글들이 나를 더한 불안의 잠식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인해서.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이 책이 아름다우며 무용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믿게 만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재의 심연으로 흘러간다. 바람에 흩어져버리는 재는 열매를 맺지 못하며 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 나는 이것을 내 영혼으로 썼다. 이것을 쓰면서, 쓰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오직 슬픔에 잠긴 나만을 생각했다. 오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당신만을 생각했다. (기둥으로 둘러싸인 회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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