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어줍잖은 지식과 경험으로 쓰는 일반인 관점의 글이라는 점을 밝혀둡니다.
의문의 출발은 단순했다.
그것은 나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문제로 두달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며 더욱 증폭되었다.
먼저, 우리나라 이야기를 해보자.
간혹 티비를 보다보면 전원일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화면에 최불암 선생님이 방안에서 담배를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고 와이프랑 소스라치게 놀란적이 있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지금부터 10여년 전에만 해도 회식을 하거나 외식을 할때 술을 한잔할 수 있는 횟집, 고기집에서 무려 실내에서 흡연을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정부에서 실시한 실내 흡연 금지와 심지어 카페 테라스(외부) 에서도 흡연을 금지하는 정책때문에 흡연자들의 욕망(술마시며 한대피기, 카페에서 테라스에서 커피에 한대 피기)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사실 나 역시 헤비스모커는 아니지만 20여년간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현재의 실정은 흡연하는 죄인이다. 아이들이 가까이오면 도망간다. 어른들은 대놓고 욕을 하는 경우가 종종있기때문에 역시 도망간다. 엄마들과 아이들이 있는경우 눈을 흘기는 경우도 종종 있어 도망간다.
물론 간접흡연의 폐해와 내가 비흡연자라면 이라는 가정을 해본다면 당연히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 상황이므로 나는 불편함 없이 투정없이 도망다니며 피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심지어 흡연자인 나도 지나가다 담배연기를 맡을 경우 짜증이 나기때문에 더더욱 100% 이해가 되는 사항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한 이후로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내가 목격한 사항을 나열해 보겠다.
(내가 자세히 알수 있는 이유는 흡연자이기때문에 그들의 문화에 맞게 피기 위해서 엄청난 관찰을 했기때문이다. )
-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에 담배하나 피는 재미로 늘 자주 앉아 있었는데 그때 옆 테이블에 엄마, 아빠, 20대 초반 아들이 와서 셋이 동시에 담배를 핀다.
- 길을 걸어가면서 한 아주머니가 담배불을 붙였고 계속 걸어가면서 핀다.
- 뜨라또리아(식당)에서 스파게티를 시키고 먹을려고 하는데 한 뭉탱이의 담배 연기가 나를 덮친다.
- 나도 식사후 담배를 하나 피는데 내 담배 연기가 옆에 한 아주머니에게 덮친다. 얼굴의 표정 변화는 일절 없다. 나는 처음에는 미안해서 움찔움찔했는데 두달쯤 되니까 익숙해져갔다.
- 식당에서 웬 아저씨가 나오더니 담배를 한대 피우고 손가락 튕기기 없이 그대로 도로에 튕겨버린다.
- 미술관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한 남자가 담배를 물고 있고, 심지어 미술관 내에서 한 여자는 전자담배를 물고 있다.
- 우피치 미술관인지 바티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내부의 카페테리아에서도 역시 흡연은 허용이다. 다들 담배를 피기 위해 카페를 찾는것은 당연한 내용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다가 담배를 피러 어딘가를 나가야하는데 이탈리아는 밖에 있다가 담배를 피러 카페 노천 테라스에 앉는다)
- 길거리에서 담배 연기는 연신 대 얼굴을 강타한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두달동안
- 우리나라 KTX 같은 열차(이딸로)를 타고 시칠리아로 내려가는데 출발전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가 나오더니 기차 문을 잡고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꽁초들은 바닥에 다 던져놓고 들어간다.
- 실외에 사실상 담배를 못피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실내에서는 피지 않는다)
어떤가?
아마도 담배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위 사례를 본다면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외국이니까 그럴수 있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안되고 저들은 되는 이유가 먼지 궁금해졌다.
매우 민감한 사항이다.
이 담배 문제가 민감한 사항인 이유는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피고자 하는 사람과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은 사람의 욕망이 정확하게 5 : 5로 대등하게 상충되기때문이다.
즉, 나는 자유롭게 어디서든지 담배를 피고 싶은데 옆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도 니가 피는 담배 냄새는 맡기 싫다고 하면 답이 없다. 그럴경우 정책이나 다른 규율로 대처를 해야하는데 우리나라는 비흡연자의 편이고 이탈리아는 흡연자들의 편인것이다.
어쨋든 이 논란은 답이 없다. 어느 입장에서도 다 이해가 되기때문이다.
그럼 왜 이탈리아를 포함하여 유럽인들에게 담배는 이토록 자유로운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두달동안 끊임없이 생각을 해본결과 아래와 같은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여행중에 생각하여 만든 용어인데 검색해보니 다른 학자들이 쓰기도 한거 같다 그러나 그냥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여주시면 좋겠다.
위 단락에서도 잠시 설명했듯이 능동적 자유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유이고 수동적 자유란 내가 피해를 받고 싶지 않은 자유다. 담배를 예를들면 내가 담배를 지금 여기서 피우고 싶은데 필수 있는자유는 능동적 자유이고 나는 어떠한 담배의 영향도 받고 싶지 않은 자유가 수동적 자유다.
이탈리아에서 한 카페테리아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아침을 시작할때 내 담배 연기는 내 뒤, 옆, 앞 모든 사람들에게 뿜어져 나갔으나 그들이 무심하고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아마 속으로
"나는 흡연자이고 어디서든 담배를 필것이다. 그리고 옆에 한국인 남자의 담배를 필 자유를 나는 존중한다. "
혹은 "나는 비흡연자이지만 저 한국인 남성의 흡연의 자유를 존중한다. "
하고 생각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 내가 피해를 주지 않는한 나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받고 싶지 않을 자유가 있다. "
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능동성과 수동성의 차이.
다른 예를 들어보자.
몇년전에 코로나가 발발했을때 우리나라 뉴스에는 마스크를 쓰기 싫다고 데모를 하는 서양인들이 등장했다. 범위는 전 유럽과 미국 등 서구 사회였는데 나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대부분이 이게 무슨 말도안되는 시위냐고 이해 자체를 할 수 없는 뉴스였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막 안쓰고 돌아다녔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고 있는 문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My Body. My Choice"
즉 내 몸이니 정부에서 마스크를 써라 마라 하지말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입장은 어떤가?
내가 코로나에 걸려서 남에게 옮길수도 있으니 우리는 열심히 썻다. 물론 내가 옮기 싫은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 우리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걸 원치 않는다 (물론 이말은 나도 피해를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서구 사회와 우리의 가치관에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담배, 마스크와 같은 민감한 사항들에서 말이다.
만약, 이탈리아나 파리, 영국에서 노천카페에서 비흡연하라는 정책이 나온다면 전 유럽을 대상으로 거대한 시위가 일어날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한 마을에서 매우 편리한 시스템이 도입된 마을 - 예로 큰 편의점이나 편리한 상점들과 건물들-을 건설하자는 의견이 나왔을때 거대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유는 아름다운 전통의 마을 건축양식과 거리를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사회와 우리 동북아 사회의 극심한 차이점 바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차이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선을 추구하고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차이가 있는데 이 중 어느것이 좋다라는 의견은 비전문가인 내가 낼수는 없고 그냥 내 생각에 집단주의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존재하는거 같다.
첫째, 개인의 자유가 희생된다.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과도하게 침해를 받게되는 개인은 사회의 송곳이 되어 튀어 나오기도 하고 희생을 당하기도 한다.
집단주의라는 말은 집단이 있다는 예기인데 국가가 될수도 있고, 가족, 마을, 아파트, 회사, 회사팀원, 커뮤니티, 모임, 같은 연령대 집합 등 매우 다양한 예를 들수가 있다. 실제 우리나라는 개개인들은 냉냉하지만 한 그룹에 들어가는 순간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변하기도 한다.
일례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백혈병에 걸린 한 아이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마치 고담시의 베트맨이 등장한것 처럼 이벤트를 마련하여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준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집단주의의 시선으로 보면 그냥 시 예산 낭비일뿐이다.
둘째, 능동적 자유가 침해되고 개인은 희생을 강요당한다.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 하게 되기때문에 개개인의 자유가 침해가 되고 그중에 능동적인 자유가 짓밟히게 된다. 즉,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보다 무언가를 해서는 안될 사항들이 계속해서 늘어나서 조심해야할 일들이 눈덩이 처럼 많아지게 된다.
한가지 예로 이탈리아에서는 아이가 등장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를 쳐다보고 눈이 하트가 된다. 물론 그 와중에 옆에 아줌마는 담배를 피우고 있고 그 뒤에 아저씨는 술을 마시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고 아이는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남의 테이블의 과자를 먹기도 하고 어떤 할머니의 무릎에 앉기도 한다. 그렇다고 피던 담배를 끊거나 다른데로 이동하여 피는 사람은 없다.
(실제 그 아이의 엄마도 한대 피고 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아이가 있으니 흡연자들은 저기 다른데로 가시라는 암묵적 눈빛들이 오고 갔을 것이고 무식하게 생긴 아저씨들은 내 아이를 만지지 말고 너무 늙은 할머니들은 무릎에 절대 앉히지 마세요라는 엄마의 눈 광선이 뿝어져 나올것이다. 그나마 아이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그 엄마와 아는 사람들(소규모 집단)뿐이다.
셋째, 사회가 삭막해진다.
나는 70년도 후반에 태어나서 80년대는 어린 시절이고 90년대부터는 본격 학생의 시절이다. (노땅)
내가 어렸을때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갈때 나와 동생을 다른 엄마에게 맞겨두고 하루종일 일하고 왔으며 내 동생 병원을 갈때는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는 슈퍼에 나를 맡겨놓고 가기도 했다고 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뛰어 놀다보면 엄마가 계란 볶음밥을 한 양푼이를 해와서 뛰어노는 애들 모두에게 한숟갈씩 떠먹여주는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였다.
하지만, 요즘은 어떠한가
MZ 세대와 같은 단어들로 세대들간의 장벽 만들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부르는 못땐 단어들과 충이라는 글자를 써서 나쁜 시선으로 바라보는 특정 집단화 작업들 등 사회가 전반적으로 매우 어둡고 친밀하지 못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거 같다.
3년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이제 그들이 왜 마스크를 안쓰겠다고 시위를 했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중에 마스크를 쓰는 사람도 있었을테고 이번에 여행에서도 간혹 쓰고 있는 이탈리아 인을 보았다. 그냥 마스크를 쓰는것은 개인의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누가 마스크를 쓰네 벗었네로 3년이 지난 아직도 지하철에서 싸우고 있다.
현재 나는 이탈리아에서 귀국한지 6일째다.
거기서 나는 누구를 보거나 웃고 다녔고 나를 보는 사람도 나를 보고 웃는다. 식당에 가도 서로가 보며 웃고 나갈때도 즐거운 인사를 하며 헤어진다.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3시간을 앉아 있어도 아무도 머라고 하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실외에서 담배를 피우고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을 만끽하며 다녔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 이후에 줄곳 나는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만 생각을 하는것 같다.
그냥 내 마음가짐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는 거다.
남의 나라에서 더욱 조심해야할 것이 많을텐데 오히려 우리나라가 불편해지고 있는 현실이란 여간 이상한 감정이 아닐수 없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내가 남에게 피해를 받고 싶지 않은 자유보다는 내가 하고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그 자유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지지해주고 지켜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고대 로마시대에 율리어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가 진두지위하는 갈리아 정복에서 한 부족의 족장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고 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 내장된 자유란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 사회가 점점 삭막해져가는 이유가 바로 능동적 자유의 희생 강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개인에게 무언가를 못하게 하는 사회 말고 할 수 있게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뚱뚱한 여성이 비키니를 입고 해변에 나올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흡연의 자유가 있다"
"나는 내 옆에 사람의 흡연의 자유를 존중한다"
"나는 매우 뚱뚱하지만 비키니를 입고 해변에서 일괄욕을 할 자유가 있다"
"나는 어떤 여성이라도 비키니를 입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존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