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고 불안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가 주는 조언"

by 따뜻한 손

'우울증'은 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만 치료하기 어려운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에게도 홀로 싸워야만 하는 내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난치병이라는 험난한 산맥을 환자들과 함께 겨우겨우 넘어간다고 해도, 긴 여정의 종말에는 죽음이라는 도저히 어찌해 볼 여지가 없는 절망의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으로부터 350년 전 청교도 목회자인 리처드 백스터가 '우울하고 불안한 그리스도인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나에게 주는 조언은, 인간이 처한 영적이고도 육체적인 여러 문제에 대해 홀로 고독하게 그 싸움을 싸웠던 선배가 그 험난한 길을 뭣도 모르고 시작해 버린 나와 같은 후배들에게 주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편지로 다가온다.


3주 전에 환자 대신 보호자가 진료를 보러 온 경우가 두 번 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비슷한 오후 시간이었다. 두 명의 환자 모두 심한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로서 몇 달의 치료과정을 통해 호전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휠체어에 겨우 몸을 싣고 오셨다가, 그다음에는 목발을 짚고 오셨고, 그다음에는 비교적 가벼운 지팡이 하나로 정정하게 걸어 들어오셨던 분들이었다. 환자들의 심리는 비슷하게 작동하기 마련이어서, 관절의 통증과 부종이 줄어들면 그동안 못하고 참았던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하게 되는데(미루어 둔 대청소를 한다거나 심지어 김장을 담그시는 분도 계셨다), 아마도 이 두 분들도 그러시지 않았을까. 보호자가 전해준 소식은 두 분 다 집안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로 수술받고 누워계신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한동안 나를 엄습했던 심한 우울증과 싸워야만 했다. 늘 환자들에게 몸의 컨디션이 좋아지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만할 때, 한 박자 쉬고 조금 더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를 단골 메뉴처럼 반복하지만, 그러한 염려와 경고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고 고관절 골절이라는 최악의 결과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 백스터의 책 맨 뒤에는 '의사의 의무'라는 챕터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목사가 육체의 문제를 다루는 의사에게 주는 '의무' 사항이라니. 이 목사님은 정말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던가?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인간을 바라보는 통합적인 시선, 즉 영혼과 육체를 존재론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한 인격을 가진 인간 안에서 영혼과 육체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그 시선 때문에 목사와 의사는 한 인간을 돌보는 영원한 동반자가 된다는 백스터 목사님의 생각은 나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백스터 목사님은 총 6가지의 의사들을 위한 지침을 써 두셨는데, 그중에 5번째의 내용 중 이 구절이 마음에 박힌다.


"끊임없이 비통한 예와 경고에 노출될수록 마음을 삼가고 무정함을 두려워해야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무언가에 너무나도 쉽게 무뎌지고 익숙해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군인들과 뱃사람들보다 감각이 더 무딘 사람은 누구일까요? 시체로 뒤덮인 전쟁터를 두세 번 정도 목격하게 되면, 그들은 대개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한 무정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사들이 처한 위험이며,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나를 뒤덮었던 우울증은 아마도 허무하게 막을 내린 치료의 낙담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려고 발동한 심리적 보호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우울증이 이런 일을 핑계로 내가 더욱 무정한 의사가 되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부터가 아이러니하면서도 너무나 따뜻하다. 우울하고 불안한 그리스도인에게 라니!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기쁘고 감사하며 믿음과 확신에 찬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이 이 험한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고 종교적 황홀경에 빠져있는 광신적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죄와 연약함과 고통과 질병을 안고 있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맛본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루하루 주어지는 성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보고, 자신의 죄와 연약함과 질병에 대해 분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의존적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한 것이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선입견에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만든다.


백스터 목사님의 한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목회적인 시각으로부터 시작된 겸손하고도 진지한 조언은 내 마음도 따뜻하게 만든다.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고 무정한 의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때때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조금 더 친숙하게 그리고 조금 더 익숙하게 나의 곁에 머물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