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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Feb 20. 2023

직장인입니다

업의 의미와 보람, 재미

살면서 사주를 두세 번 본 적 있는데, 가장 최근에 들은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 중에 하나가 있다.


'당신은 자아실현을 위해 돈벌이를 하는 사람입니다.'


들을 때만 해도 자아실현은 무슨. 돈만 많으면 그까짓 직장 당장 때려치우고 놀지, 힘들게 누가 돈 벌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한창 승진 누락에 육아 병행으로 심신이 피곤에 절어 있던 때라 자아실현이고 뭐고, 벌어먹고 살아야 되는 삶 자체가 고난인 시기였다.


사직 결심을 하고 돌아보니 결국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 가장 큰 이유가 '자아실현'의 문제인 것 같다. 요즘 많이 나오는 기사인 '자아실현을 위해 그만두는 MZ 세대'와 이유가 같다니, 내일모레 마흔인지라 좀 웃프다. 자의식 과잉 세대라는 MZ집단에 한 묶음 되기엔 지난 10년 동안 버텨온 막내 시절이 있어서 좀 억울하다.


10년의 세월이 짧지는 않은지라 많은 희로애락을 거쳤다. 나의 손을 거쳐 나온 첫 양산품을 공장에서 확인하던 순간의 뿌듯함은 몇 안 되는 회사 생활의 보람이었다. 예민한 데다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는 잦은 회식 때문에 과민성 대장염을 달고 살았고, 같이 입사한 부서 신입이 4명이라도 제일 먼저 출근해 커피를 내리는 것도 당연히 나의 일로 받아들였으며, 이유는 생각도 나지 않지만 화장실에서 문 잠그고 울어도 봤고, 아무튼 그 시대 신입들이 한다는 건 나도 대다수 해보았다. 아, 성희롱도 있었다.


그런 반면 소속 집단을 언제나 사랑해 온 나는 애사심이 깊었다. 결과물이 상품으로 나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좋았고, 잘 팔리면 기뻤고, 여러 부서와 협력사들과 협업해서 문제없이 상품이 잘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과정도 보람찼다. 그야말로 가족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 회사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면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대표만 줄줄이 선임되고, 브랜드 이미지마저 추락하며 나의 애사심과 자존감도 같이 추락했다. 회사의 추락하는 이미지와 실적이 내 자신인 것 같았다. 가족들이 회사를 걱정하자 내 자신이 동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는 덴 시간이 좀 걸렸다. 일 자체를 떠나서 회사를 사랑한 시간도 짧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망이 5년째 연봉 동결이 되자 절망으로 바뀌었다.


이 회사는 직원을 대우해 줄 생각이 없구나.


회사가 싫어지자 작은 부분 하나까지 다 싫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별로인 회사를 다니는 나 자체가 별로인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자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침몰하는 배를 떠나야겠다.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는 일이 내 인생을 갉아먹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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