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연재 하려 합니다.
#1. 20년의 공백, 그리고 0.1초의 확신
그녀의 세계에는 구멍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마치 정교하게 짜인 코트의 단추 하나가 뜯겨 나간 것처럼, 혹은 오래된 필름의 특정 프레임만 하얗게 타버린 것처럼 존재했다.
그녀는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친구의 생일을 챙기고, 어제 먹은 점심 메뉴를 기억한다. 의사는 그것을 '해리성 기억상실'의 일종이라 했지만, 그녀는 '방어기제'라고 불렀다.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특정 대상을 도려내는 현상. 그녀의 뇌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워버린 대상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LY.
그의 이름을 발음하면 혀끝에 쌉싸름한 맛이 돌았다.
타인들이 말해주길, 두 사람은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꽤 긴밀한 이메일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단 한 줄의 문장도, 단 한 번의 목소리도 남아있지 않다. 기록은 있으나 기억은 없는 관계. 그 기이한 공백이 20년이나 이어졌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설명이 불가능했다.
퇴근길 지옥철이라 불리는 사당역 4호선 환승 구간. 수백 명의 어깨가 파도처럼 부딪치고, 땀 냄새와 에어컨 냉기가 뒤섞인 그 혼란스러운 회색 공간에서.
그녀는 멈췄다. 마치 누군가 발목을 낚아챈 것처럼.
저만치 앞, 스크린도어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검은색 정장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핸드폰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심장이 갈비뼈를 부러뜨릴 듯이 뛰기 시작했다. 논리가 아니었다. 뇌가 기억을 지웠다면, 몸이 기억을 복구하고 있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신호를 보냈다.
'저 사람이야.'
그녀는 홀린 듯 인파를 헤치고 다가갔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눈매, 굳게 다문 입술. 20년의 세월이 내려앉아 소년의 티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나의 과거. 내가 잃어버린 유일한 퍼즐 조각. LY였다.
#2. 빗소리의 잔상
그 순간, 지워진 기억의 심연 속에서 딱 하나의 장면만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투두둑, 투둑. 세상이 물에 잠길 듯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꼬마와, 교복을 입은 중학생 오빠.
축축한 흙냄새가 진동하던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 그 비좁고 어두운 공간. 세상과 단절된 것 같았던 그 작은 돔(Dome) 안에서 두 사람은 무릎을 맞대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빗소리가 너무 커서 서로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그날. 그가 무언가 말했었다. 입술이 움직였고, 어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입모양이 무엇이었는지, 그날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여전히 검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오랜만이네."
지하철역의 소음 속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20년 만에 듣는, 아니 어쩌면 생전 처음 듣는다고 착각할지도 모를 그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지워졌던 그녀의 세계가 삐걱거리며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