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점짜리 슬픔과 죽음의 무게

그날 아버지와함께 내가알던소녀도 죽었다.

by 자기계발중독자

5점짜리 슬픔과 죽음의 무게


"증거... 가져왔어."


LY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코트 안주머니에서 낡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종이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색은 누렇게 바래 있었다. 20년의 세월을 견딘 종이였다.


"네 성격이라면 말뿐인 추억 따위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너한테 받은 편지들, 다 가지고 있거든."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를 여는 손길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저 사실 여부를 판별하려는 감식반원의 태도였다. 그녀는 접힌 편지지를 펼쳤다.


익숙한 필체였다.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글씨, 'ㄹ'을 쓸 때 밑부분을 둥글게 굴리는 버릇. 영락없는 자신의 글씨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도무지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To. LY 오빠에게 안뇽? 나야! 오빠, 나 이번 수학 시험 완전 망했어 ㅠㅠ 진짜 억울해. 계산 실수로 딱 1개 틀렸는데 5점이나 깎였어. 자그마치 5점!! 이것 때문에 등수 훅 떨어지게 생겼어. 엄마한테 혼날 텐데 어떡하지? 오빠가 지난번에 알려준 공식은 기억났는데, 적용을 잘못했나 봐. 멍청이인가 봐 난...]


편지 곳곳에는 귀여운 이모티콘과 우는 표정의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읽어내려가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기가 막혀서였다.


"이게... 나라고요?" "응. 고등학교 1학년 때, 중간고사 끝나고 네가 독서실에서 줬던 쪽지야."


그녀는 편지 속의 소녀를 노려보았다. 고작 수학 점수 5점에 세상이 무너진 듯 슬퍼하고, 등수가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이. 삶의 에너지가 넘쳐흐르다 못해 종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이 '밝은 아이'가 나였다니.

그녀의 머릿속에서 흑백 영화 같은 기억이 스쳤다.


병원 복도의 소독약 냄새. 삐- 하고 울리던 심전도 기계의 단조로운 소음.

7년의 병수발 끝에 남은 건 빚더미뿐인 집. 그리고 의사가 내밀었던 서류 한 장.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DNR). 여기에 보호자분 서명이 필요합니다.'


어머니는 손을 떨며 울기만 했고, 결국 펜을 든 건 갓 성인이 된 그녀였다. 그녀가 서명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이기도 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녀는 깨달았다. 죽으면 다 끝이다. 그리고 지난 7년간 내가 할수있는건 다 했다. 7년도 내겐 너무 긴 시간이였지만, 더 길게 끌지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그곳에선 아프시지 말고 편안하게 지내세요


5점이 깎이든, 대학을 어디를 가든, 사람이 죽어서 재가 되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그런데 이 편지 속의 나는, 고작 5점에 울고 있구나.

"글씨체는 제 것이 맞네요."

그녀는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내용은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입니다. 저는 이제 겨우 5점 따위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알아. 네가 변했다는 거."


LY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그녀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그 7년의 지옥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쓴 아이도 너야. 네가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시간 속에, 이렇게 빛나던 너도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LY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무의식 저편, 흐릿한 안개 속에 감춰진 진실.


그녀의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을 때, LY의 부모가 그녀를 찾아왔었다는 사실.


'너희 집 사정은 안타깝지만, 우리 애 앞길 막지는 말아다오. 각자 대학 가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게 좋겠다.'

그 모욕과 비참함이 아버지의 죽음과 뒤섞여, 그녀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LY라는 존재 자체를 기억에서 삭제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그녀는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증거는 확인했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떼는 반쯤 남겨진 채 식어 있었다.


"당신 말대로 우리가 과거에 알던 사이였다는 건 인정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제가 당신과 다시 친해져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요."


그녀는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하지만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뇽?'이라고 씩씩하게 인사하던 17살의 내가, 등 뒤에서 자꾸만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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