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섞어 놓은 듯한
로마 건국 시조 아이네아스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보고 <오딧세이아>와 <일리아스>를 합쳐 놓은 동양판 서사시라는 의견을 적었는데, <아이네이스>야말로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를 가장 완벽하게 합쳐 놓은 작품이었다. <아이네이스>에는 역사, 등장인물, 문체, 서술방식, 심지어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까지 호메로스의 두 작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아이네이스>를 2개의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그중 하나에 주석이 과도하리만치 많았고, 그 주석의 반절 이상은 해당 문장이 <일리아스> 또는 <오딧세이아>의 어느 부분을 모방하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만큼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의 서술 방식과 문체, 표현 등을 작품 전반에 걸쳐 모방했는데, 그가 호메로스를 얼마나 추종했고 그의 작품 연구에 얼마나 몰입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당시 호메로스가 서사시의 교과서로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시조로 여겨지는 영웅 '아이네아스'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다. 총 1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1~6권을 상편, 7~12권을 하편으로 나눌 수 있다. 상편은 <오딧세이아>와 매우 비슷한 내용으로, 아이네아스가 트로이아를 떠나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이탈리아에 당도하기까지의 내용이다. <오딧세이아>에서 오딧세우스 역시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트로이를 떠난 뒤의 모험(좋게 말해 모험이지 고난이다)을 그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흥미롭다. 오딧세우스와 아이네아스 둘 다 트로이를 떠나 각각 고향과 고향이 될 곳을 찾아 고난의 모험을 해 나가니 말이다. 아이네이스가 저승에 가서 아버지의 영혼을 비롯한 저승의 존재들을 만나 통찰을 얻는 장면 역시 <오딧세이아>에서 오딧세우스가 저승을 방문하는 부분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이 부분은 훗날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묘사에 큰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신곡> 지옥 편에서 주인공 단테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이 다름 아닌 베르길리우스다.
그리고 하편은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서 건국을 위해 토착민들과 전쟁을 벌이는 내용이다. 두 연합의 대전쟁을 다루며, 수많은 장수가 어떻게 싸우고 죽었는지를 나열한다는 점에서 <일리아스>와 비슷하다. 또한 주인공인 아이네아스가 처음에는 본진을 떠나 있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돌아와 싸우고, 그가 보호해야 했던 연합국 왕자 팔라스가 죽자 분노하며 살육을 벌이는 점이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를 연상시킨다.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베르길리우스가 그저 호메로스를 지나치게 모방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모방을 매우 훌륭하게 해낸 것은 물론, 이야기의 구성과 표현력에서 더 진화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리아스>에서 개인이 결여되어 있고 <오딧세이아>에서는 표현의 문제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아이네이스>는 모험과 대전쟁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아이네아스와 투르누스의 개인적인 감정과 캐릭터에 집중했다. 또한 일행의 이동과 그들이 겪는 사건들이 매끄럽게 잘 표현되어 있고, 과거와 미래, 이승 저승을 넘나드는 시공간의 복잡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들을 잘 구분해 이해하기가 쉬웠다.
호메로스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신화 서사시인만큼 작품 내 신들의 역할도 눈여겨볼만했다. <아이네이스>의 신들은 그 역할이 매우 명확하다. 지켜볼 때는 지켜보고 어떤 영향을 미치려 할 때는 확실하게 행동한다. 유노(헤라)와 베누스(아프로디테)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다른 요정을 보낸다거나, 호메로스에서 흔히 그러듯 다른 사람에 빙의해 뜻하는 일을 이루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들의 개입이 적극적이지는 않다. 꼭 필요할 때만 나서며, 이 역시 유피테르(제우스)에게 저지당하기 일쑤다. 신들이 직접 참전해 전쟁을 벌이던 <일리아스>와는 거리가 있고, 비교적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오딧세이아>와 비슷하다. 또한 <아이네이스>의 신들은 호메로스의 신들보다는 덜 지질하다. 그놈의 사과 하나 때문에 끝까지 트로이야 인들을 괴롭히는 유노가 좀 밉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신들의 생각과 행동에 설득력이 있고 그럴듯한 방법으로 행동하기에 이해가 된다. 수백 년이 지나 종교가 교육과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신화적 사상이 구체화되고 위엄을 강조해 나간 것처럼 느껴진다.
트로이아의 후예를 자처한 로마
<아이네이스>는 그리스 신화였던 호메로스와 달리 로마 신화이기에 신과 인물의 명칭도 모두 로마식으로 쓰여 있으며 로마에 대한 찬가가 두드러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작가 베르길리우스가 로마인이며, 심지어 그는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와 동시대인이다. 황제를 직접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고 하니 그 영향이 매우 지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이네이스는 아우구스투스를 기준으로 수 세기 전 이야기인데도, 미래를 예지 하는 장면들을 넣어가며 여기저기에서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 가문을 찬양한다. 아이네아스가 저승을 찾아갔을 때, 아버지 앙키세스를 만난다. 여기서 앙키세스는 훗날 아이네아스의 자손이 로마를 건국하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등장해 로마의 찬란한 문명을 이끌며 세계를 제패한다고 예언한다.
실제로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아이네아스가 나라를 세우고, 그의 사후 아들 아스카니우스(이울루스)가 다른 곳에 알바라는 나라를 세워 율리아 가문을 낳는다. 그리고 알바의 마지막 왕에게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어나 드디어 로마를 세우고, 이후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까지 이어지며 로마는 지중해권 전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거듭난다.
아이네아스는 <일리아스>에도 등장하는 트로이 출신임에도 그 후손들은 트로이아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으로 살았으며 역사도 이탈리아의 역사로 기록된다. <아이네이스>에서는 그 이유를 유피테르(제우스)와 유노(헤라)의 합의에 의한 것으로 제시했다. 유노는 끝까지 투르누스를 앞세우며 아이네이스의 앞길을 막았고, 유노의 힘이 강한 만큼 그에게서 위기를 느낀 유피테르는 유노에게 협상할 것을 요구한다. 더 이상 아이네이스의 길을 막지 않는 대신, 그들은 유노가 증오하는 트로이아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 유노는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결국 아이네이스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이들은 신들의 의지에 의해 그토록 사랑했던 트로이를 뒤로 하고 이탈리아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아이네이스>는 이렇게 잊힌 로마인의 정체성을 재미있는 것은 로마뿐 아니라 영국과 북유럽 문화권도 트로이의 후예를 자칭했다는 것이며, 심지어 튀르크족이 트로이의 후예라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훗날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저마다 로마의 후예임을 자칭했던 것과 흡사하다. 트로이가 신화 속 멸망당한 패전국이었음에도 이렇게 위상이 높았던 것이 흥미롭다. 이렇게 쇠퇴한 문명의 유지를 이어받아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신흥 문명은 역사 속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식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