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극개 Nov 06. 2024

17. 인간 본연의 모습을 노래한 '인곡'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데카메론>은 흑사병(페스트)이 창궐해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 나가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작가 보카치오는 직접 그 시대를 겪은 이후 이 작품을 썼다. 주변 가족과 친구들이 죽고 사회 전반이 무너져가는 암흑기에, 7명의 귀부인과 3명의 청년이 모여 암울한 도심을 떠나 교외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에 모인다. 이들은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며 왕과 왕비의 역할을 하고, 모두가 돌아가며 이야기 하나씩을 들려준다. 이런 생활은 10일 동안 계속되어, 하루에 10개의 이야기 10번으로 총 100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왕비 또는 왕이 된 사람은 그날의 이야기 주제를 정한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귀부인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들의 이야기는 자극적이고 세속적이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연애, 불륜, 일탈 등에 대한 이야기이며 성애의 묘사도 거침이 없다. 물론 이야기를 듣는 부인들이 얼굴을 붉히거나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모든 참여자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그저 체면치레일 뿐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세속적이어서, 저 시대에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지, 그런 이야기가 어떻게 책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몇 가지 충격을 받은 이야기를 들어 보자면, 친구가 서로의 부인을 유혹하다가 결국 부인들을 공유하게 된 이야기, 8명의 남자와 1만 번을 즐기고도 숫처녀로 왕비가 된 여자의 이야기, 수도원에 숨어든 남자가 모든 수녀들과 성관계를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남편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는 이야기 등이다. 그저 불륜을 저지르며 외간 남자 혹은 여자와 관계를 맺는 이야기 정도는 너무 흔하디 흔하다. 


재미있는 것은 화자가 대부분 여성인 만큼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당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소유물 취급을 당하며 여성들의 욕망이 죄악으로 간주되던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실제로 보카치오는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 그는 서문에서 <데카메론>이 여성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 억압받고 무료한 삶을 사는 여성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함이고, 무시당하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어 대리만족을 시켜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보카치오가 여성 문제에 대해 시대를 뛰어넘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작가 개인적인 견해와는 별개로, <데카메론>을 여성주의적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여성을 부수적인 존재로 여기던 당시 사회 통념과는 달리 여성에게도 욕구가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능력과 의지도 얼마든지 있음을 보여 주는가 하면, 사회 통념 그대로 스스로를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고 남성에 무조건 복종하는 여성을 그리기도 한다. 여성 해방을 외치는 것 같다가도 지나친 정숙함을 강조한다거나, 여성의 욕구를 드러내지만 반대로 순종적인 여성을 신격화하기도 한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마지막 이야기인 그리셀다의 이야기다. 백작이 천한 신분의 그리셀다와 결혼한 뒤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온갖 잔인한 일들을 벌인다. 그리셀다는 자기 자식이 죽임을 당했다는 거짓에 속으면서도 끝까지 순종하고 정숙함을 유지하며, 이러한 지고지순한 모습이 현명하고 모범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런 보카치오의 관점이 이중적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중적이라기보다 입체적이다. 보카치오는 현실 속 인물들 본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것뿐이다. 즉, <데카메론>은 페미니즘이라기보다는 리얼리즘이다. 이는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뿐 아니라, 종교와 수도사, 남성, 귀족, 왕 등 다양한 인물들 역시 신화나 성경에서 보던 모습과 다른,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들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부패하고 한심한 수도사나 지도자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자애롭고 현명하게 그려지는 지도자들도 있다. 평소 존경받던 인물들 혹은 엄격한 규율에 얽매여 있는 인물들도 결국에는 욕망에 지배당하는 한낱 인간임을 100편의 이야기들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당시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던 여성들이 주가 되어 인간 본연의 욕망을 드러내는 이야기의 구조상 <데카메론>은 자연스럽게 여성 해방의 코드가 깔린 여성주의적인 작품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데카메론>이 여성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통념을 바꾸어 놓는 데 기여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데카메론>의 리얼리즘은 내세 중심이었던 당시의 세계관을 현실 중심으로 바꿔 놓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내세중심적 작품으로 당시 사회에 경종을 울린 단테의 <신곡>이 나온 지 3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정반대 되는 작품을 써낸 것이 실로 대단하다. 재미있는 것은 보카치오가 단테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최초의 단테 학자로 여겨질 만큼 단테를 연구했으며, 그의 저서 중에는 <단테의 생애>라는 작품도 있다. 게다가 <신곡>을 매우 감명 깊게 읽었는지 <데카메론>에는 <신곡>에서 인용한 문체나 내용들이 매우 많다. 그래서 <데카메론>은 <신곡>에 빗대어 '인곡(人曲)'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단테가 내세를 중심으로 신성한 노래를 했다면 보카치오는 현실을 중심으로 인간에 대한 노래를 했다는 것이다. 


<신곡>은 아름답고 신성하지만 너무 이상적이고 도덕적이다. 반면 <데카메론>은 세속적이고 저속하지만 현실적인 만큼 삶에 직접 와닿는다. 두 작품 모두 각각의 가치관에 맞는 교훈을 준다. 내세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세에서 어떻게 즐기고 처세하며 살아야 하는가? 지나치게 쾌락주의적인 사람이 <신곡>을, 이상주의적인 사람이 <데카메론>을 읽는다면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태도를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16. 인류의 암흑기를 밝혀준 <신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