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의 Oct 19. 2015

나잇값 하지 않을 나의 자유

자유에 대한 도전

 스무 살에 사회공헌을 해보겠다고 야심 차게 봉사를 나갔다. 유난히 말을 듣지 않고 떼를 쓰던 아이가 내 봉사팀의 멘티였다. 나이는 여덟 살. 미운 네 살의 두 배라 두 배 만큼 힘겹게 구나 싶을 만큼 그 아이를 돌보기는 쉽지 않았다. 장난기가 많고 떼쓰는 아이를 견디다 못한 한 멘토가 말했다. “왜 이렇게 애같이 구니.” 이 말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아이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울음과 함께 자기는 아기가, 애가 아니라는 항변이 이어졌다. 아이는 애 같지 않다는, ‘너는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고서야 울음을 그쳤다. 아이의 울음을 달래는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반발감이 솟았다. 아이에게 아이같이 군다는 말이 왜 야단치는 표현이 될 수 있고, 또 어른스럽다는 말이 왜 칭찬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아이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나의 아버지는 엄격하신 분이었기에,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엄격한 교육하에서 자랐다. 엄격하게 예절 교육을 받았기에 주변 어른들에게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란 ‘어른스럽다’는 것이었다. 주변의 어른들은 그 말을 자주 칭찬 삼아 건넸다. 그래서 나는 늘 어른스럽게 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데 그랬던 것이 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서러웠다. 그 나이 때에 내 나이답지, 아니 진짜 ‘나’답지 못했던 것이.


 어린아이가 나이답지 않게 감정을 억누르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어른스러운 것이고 어른스럽지 못한 아이는 잘못된 것인가? 개인에게 사회가 드리우는 나이에 대한 잣대는 종종 이렇듯 폭력적이다. 이 잣대의 폭력은 어린아이뿐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작용한다. 노인은 지혜로워야 하고, 점잖아야 한다. 노인이 연애하고 싶으면 ‘나잇값을 못하는, 주책’이라는 말을 듣는다. 사회의 흔한 인식 속에서 어린아이는 어른스러워야 하고 어른은 나잇값을 해야 한다. 개인이 하고 싶은 것을 나이보다 낫지 못하다는, 나이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제약한다. 마치 개인을 철침대 위에 누이고 철침대보다 짧으면 늘리고, 길면 자르는 것처럼.


 이 잣대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나이에 대한 관습적인 잣대 때문에 기다리거나, 참거나,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연애하고 싶으면 내가 열일곱 살이든 일흔 살이든 하면 된다. 개인 스스로가 눕혀진 잣대의 철침대에서 일어서는 것이다. 답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관습적 잣대의 벽에 부딪히는 도전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 견고함의 탓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떳떳하지 못한 나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 나는 잊어버린 채 어느새 타인의 시선을 먼저 의식하고, 사회의 평균적인 잣대에서 어긋나는 것을 불안해하는 나 자신. 내 생각을, 내가 하는 행동을, 나를 떳떳하게 여기지 못하는 나 자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추구하는 행복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내 가치관을 억압하는 잣대의 폭력에 마주치면 저항해야 한다. 사회를 바꿔온 것은 언제나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돌아봐야 한다. 나 자신도 누군가를 철침대에 눕히고 있지는 않은지. 나 역시 내가 겪는 잣대의 폭력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사회가 변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사회는 결국 개인의 합이다. 개인인 내가 변하면 어느샌가 사회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시나브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