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가장 인간적이었던 수업
아직 이르지만
20대를 통틀어서 가장 인간적이었던 수업으로 기억에 남을 강의에 대한 수강 후기 에세이.
*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학
"자유민주주의와 이데올로기"
덕성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성진 교수님
<우리는 대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한 청년이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물에 잠긴 청년의 의식이 멀어지는 동안, 그는 살기 위해 저항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그 무엇도, 청년에게 살기 위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 청년은 십여 년 동안 가족과 타인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수재였다. 그는 어린 시절 부터 학문에 매달린 끝에 명문대학에 입학했지만 허무함을 느꼈다. 삶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목마르게 찾아 헤매었지만, 그것은 히브리어와 수학,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사회는 상층부로 올라가지 않는 채 한 자리에서 번민하는 청년에게 매몰차게 등을 돌렸고, 젊은 기대주는 한순간에 한심한 인물로 전락해버렸다. 이 청년은 헤르만 헤세의 저명한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 속의 한스다. 한스가 인생을 걸다시피 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했던 학문과 대학.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올겨울, 마지막 학기의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던 나는, 한 서울대생의 투신 소식을 접했다.
언론과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의 자살 원인을 가난과 엮기에 바빴다. 경제적 처지에 대한 비관. 과연 그뿐이었을까. 그가 죽음과 함께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고작 현시대의 뜨거운 감자인 수저 색깔 논쟁만은 아닐 것이다.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더라’고 말한 그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던졌다. 현대사회에서 너무나도 저평가 되는 본질적인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 오로지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본질적 가치에 대해. 우리의 시선에서는 너무나 안타까우며 짧았으나, 본인에게는 길고 고통스러웠을 이십여 년의 삶에서 고인이 된 그 청년은 느꼈을 것이다. 인간이 살지만 인간적이지 못한, 인간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를 말이다.
아마도 한스와 고인이 된 관악구의 한 청년이 끊임없이 했을 종류의 고민을 나 또한 했던 적이 있었다. 고생 끝에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얻은 20대의 개인이 이력서 두어 장으로 요약되어 때로는 조롱거리가, 때로는 비교우위의 논리에 따라 저평가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 이러한 현실에서 순수 학문을 배우는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이고,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한참을 허무함과 회의감에 빠져 있을 시기, 내 고민에 답을 주었던 수업이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이데올로기. 정치외교학과의 스무 살을 위한 전공 커리큘럼. 김성진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16주, 한 주에 세 시간. 김성진 교수님은 매시간, 수업 주제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던졌고, 의미에 대한 고찰을 요구했다. 의문과 고찰이 가득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이 시간을 통해 내가 대학에 왔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종강이 된 이 시점,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학문은 인간의 의미와 맞닿아 있어야 하고, 우리는 인간적인 가치를 알기 위해 배워야 하며, 또한 인간적이기 위해 배워야 한다.
<아무도 본질을 묻지 않는 사회에서, 본질을 물으라 가르치는 교수, 그리고 수업>
“레저(leisure)의 본래 의미가 뭔지 알고 있나요?”
학기 초, 수업을 시작하며 교수님이 질문을 던졌다. 대다수가 스무 살인 1학년 수업 강의실에서는 가볍고 유쾌한 답변들이 쏟아졌다. 독서, 휴식, 여행과 오락. 교수님은 웃으며 쏟아져 나온 답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어지는 강의에서 알게 된 레저의 본질이란,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레저의 본래 의미는, 인간답기 위한 무엇인가를 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을 더 하기 위한 휴식을 레저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일을 안 하는 것 혹은 그런 상태를 레저라고 보는 거니까. 기본적으로는 사회가 너무나 경제적이 되어있는 게 문제라고 할 수도 있어요. 경제 비경제로만 구분하다 보니까 그냥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히 레저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레저는 그것보다 더 적극적인 개념이라는 것.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 ‘무엇’에 대한 개념이 없는 거죠. 자기 자신을 개발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건 어느 사이에서부터인가 사회에서 레저의 범주에서 빠진 겁니다.”
수업을 들으며 계속해서 고민했다. 과연 내 이십여 년의 삶 중에서, ‘레저를 즐겼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나는 얼마나 ‘인간’다웠는지. 이렇듯 자유민주주의와 이데올로기 강의 속 여러 정치사상과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은 모든 것이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수강자가 그 본질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얼마나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16주 동안, 나는 수업시간마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사회 속에서 내가 당연하게 경험하고, 알고 있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의 본질적 의미가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대학 강의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충격을 받은 것은 조금 더 이전이었다. 몇 년 전, 바로 동일한 수업에서.
스물한 살 무렵,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서 밤을 새우고 학교에 온 나는 강의가 끝난 강의실에서 잠들어버렸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수면실이 된 강의실에서는 이미 낯선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고 상황파악이 되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 강의의 수강생인 척 해야 한다는 것을.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인 강의실에서 내내 자던 학생이 갑자기 가방을 들고 일어나서 나가버린다면 교수님도 학생들도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 나는 혼란과 수치를 야기하는 것보다 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 태연스럽게 가방에서 필기 노트를 꺼내들고 수업을 경청한 것이다.
얼굴을 모르는 낯선 교수가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나의 복수전공을 정치외교학과로 향하게 만들었다. ‘여러분이 배우는 지식에 사람이 없으면 안 배우느니만 못합니다.’ 학문은 인간적인 것이어야 하고, 학문을 통해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대학에 와서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것이 바로 그 강의실에 있었다. 내가 대학에 온 이상,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 그리고 약 3년이 지나 나에게는 대학 마지막 수업 학기인 올가을. 나는 20대 초반에 의도치 않게 도강했던 강의를 정식으로 수강신청 했다. 김성진 교수님의 자유민주주의와 이데올로기를.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학>
정치학을 3년을 배우고 나서야 왜 내가 김성진 교수님의 강의를 좋아했는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김성진 교수가 가르치는 정치학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인간적인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무엇이 인간적인가에 대해 고찰하며 배우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내가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 의미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이데올로기 수업을 들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문은 인간의 본질적 의미와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 화분에 흙만 계속해서 채운들, 씨앗이 없으면 그 화분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우리가 배우는 지식의 가운데에 인간에 대한 고찰이 없다면 그 학문은 그저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이 없는, 허울뿐인 학문이 사회에 만연해지면, 인간의 가치가 도구적으로, 무언가의 하위개념으로 여겨지는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이가 없어질 것이다. 모든 학문과 이를 가르치는 수업 속에 인간의 본질에 대한 존중이 담겨있어야 그 학문을 익힌 인간이 이루는 사회가 인간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경제적, 외적, 관습적 그 어떤 잣대의 저울에 올라서서 가치를 평가받고 그에 따라 대우받는 것이 아닌, 인간 그 자체가 존중받는 사회여야 한다.
언론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기자를 꿈꾸고 있다. 대학생의 신분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사회 곳곳을 다니면서, 나는 늘 수업에서 배운 것을 떠올렸다.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서도, 모 대기업의 산재 사망자를 위한 시위 현장에서도. 그 무엇에도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이 가르침을 늘 기억할 것이다. 수업은 끝났지만, 교수님의 가르침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