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지
왜 나의 첫 평양냉면은 맛이 없었는가 (feat 회장님?)
때는 이번 주 수요일이었다. 전날 밤 논술 스터디장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에 평양냉면 한 번 아니 먹어서 되겠느냐 주장했다. 비록 우리가 놀려고 모인 사람들이 아니나 현장도 학습이다. 옳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동의했다. 시의적절한 대의명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보기 드문 남북 평화 기조가 아닌가. 어쨌든 냉면 먹을 대의(핑계)를 하나 건진 우리는 다음날 점심 충무로의 줄 서서 먹는 바로 그 냉면집으로 향했다.
시작이 좋았다. 줄도 서지 않고 냉면집에 들어섰다. 테이블에 앉아 태연하게 “물냉 세 개, 만두 한 접시요.”라고 말하고선 무척이나 설렜다. 부끄럽지만 그 날 먹게 될 냉면이 나의 첫 평양냉면이었던 이유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사고는 바로 그때 터졌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니만…….
“야! 너! 내가 김치 가져오라고 했어 안 했어! 야, 이렇게 늦으면 내가 냉면 먹겠냐?”
허공을 가르는 고성. 시끄럽던 주변이 한순간에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의 바로 옆 테이블에 있었다. 반듯한 양복을 차려입고 각 잡고 앉은 4-50대 남성들 가운데 홀로 편안한 자세의 남성. 그의 앞에는 창백해진 얼굴의 종업원이 서 있었다. 남성은 김치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분노의 성토를 이어갔다. 말끝마다 야, 야. 반말과 경시가 이어졌다. 늦어서 죄송하다 중얼대는 종업원은 나의 어머니뻘이었다.
그래, 고작 김치 한 종지였다. 그는 고작 김치 한 종지가 늦어지는 것에 그렇게 뜨겁게도 분노했다. 옆에 앉은 이들은 경직된 표정이면서도 ‘감히’ 그를 말리지 못했다. 통재라. 슬픈 사회다. 저이는 또 어느 회사의 갑인 것인가. 네가 무엇이라고 사람을 하대하냐. 도대체 네가 누구냐. 냉면 한 그릇 샀다고 인간을 막대할 권리까지 산 양 착각하는 너는. 대체 이 무슨 작태냐. 네 이름은 구태냐. 혹여 나라님이냐. 나라님도 그따위로 굴어서는 아니 되는 세상이온데요.
어디서 갑질이냐는 말이 목 끝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던 그 순간이었다.
“이봐 아저씨!”
다른 남성이 그 갑 아닌 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고마웠다. 이 분노스러운 순간에 이렇게나 속 시원한 정의의 사도라니.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말에 사이다 뚜껑을 따다가 말았다.
“여기 밥 댁 혼자 먹어?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
안타까웠다. 왜 질타가 본질을 향하지 못하고. 동등한 인간이 서비스직이라는 이유로 인격을 무시당한 것보다 소음공해가 더 탓할 일이란 말인가. 종업원도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이자, 누군가의 귀하디귀한 가족일 텐데. 무시당한 인격이 어설프게나마 지지받을 기회는 날아 가버리고 말았다. 나 역시 입과 혀를 가지고도 제때 지적하지 못했으니 부끄러움에 할 말은 없음이다.
갑질이 잠시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식당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갑질의 주범은 주변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회사의 갑이라는 이유만으로 갑질과 폭행을 일삼은 재벌가가 반성문을 쓰고 자리를 내놓아도 그에게는 남 일이었던 것이다. 저이도 뉴스를 보며 그 재벌가를 욕했을지 모른다. 반성 없는 ‘내로남불’이 넘쳐나는 이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뉴스는 왜 여타의 갑들에게 교훈이 되지 못하는가. 만행을 저질러도 그들에게 후일을 도모할 여지와 재기의 기회가 있기 때문일까. 이 사회에 저런 갑이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그 갑질에 베여 상처 입어도 기댈 곳 없어 버텨야만 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냉면이 불어가고 있었다. 담백한 고기육수와 면발에도 어쩐지 냉면이 맛이 없었다. 입이 썼음이다. 냉면이 나왔는데 왜 맛있게 먹질 못하니. 그렇게 나의 첫 평양냉면은 모 회사 고위직의 갑질로 얼룩져 맛이 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