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와 동정 그 어딘가
무료 급식권 받아야 하는 학생은 조례 끝나고 교무실로 오세요. 조례를 마친 담임선생님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교실이 일순간 술렁거렸다. 무료 급식권을 줘? 왜? 호기심에 수군거리는 아이들 틈에서, 나 혼자 얼어붙었다. 주변의 공기가 확 다르게 느껴지던 그 순간.
교무실로 가기까지는 무던히도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결국 죄인 아닌 죄인 같은 기분으로 교무실 문 앞에 섰다. 교무실에 들어가서 무료 급식권을 받는 순간, 모든 선생님들이 알게 될 것만 같았다. 우리 집의 사업이 망했다는 걸.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들추어내야 하는 발걸음이 천근이었다.
내가 용기를 끌어 모아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 담임선생님의 자리에는 나보다 먼저 온 아이가 있었다. 내 짝꿍이었다. 그 아이의 손에 쥐어지는 노란 급식권. 그 애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교무실을 뛰쳐나왔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던 내 뒤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나는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뻣뻣하게 돌아섰다. 나 본거 모른 척 해주라. 친구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비겁하지만 안도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나 너 뭐하는지 못 봤는데.
열네 살. 한 끼의 배고픔보다 자존감이 더 중요했던 시기의 나는, 몇 달의 점심시간을 그냥 잠으로 보내고는 했다. 인간적인 배고픔이 자존감의 바닥까지 긁게 만드는 수치심을 이기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교무실에서 마주한, 그 친구의 표정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게 바로 내가 부끄러워서 직시하지 못한, 열네 살의 내 표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난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배어나는 표정. 인격체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간신히 만들어 썼던 가면이, 강제로 벗겨질 위기를 마주한 열네 살의 표정을.
한 언론사의 기사에서 정부의 저소득층 생리대 지원 사업을 보았다. 정부는 인권을 위한 사업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저소득층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 생리대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생리대를 받기 위해 보건소에 자신의 신상 정보를 기재하고,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입증할 서류를 줄줄이 제출하고 나서야 생리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자신을 노출하느니 차라리 생리대를 포기하겠다는 기사 속 인터뷰 한 줄 한 줄에서 그 아이들이 느꼈을 감정이, 지었을 표정이 묻어났다.
아이들이 생리대를 받는 것을 포기하는 이유는, 비록 숨어서 곤란함을 겪을지라도, 그 선택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도움의 손길을 받으려면, 직접 증명하라는 것은 ‘가난하다는 것’을 강제로 인정하고, 학습하는 경험이다.
생리대 지원사업에서 정부가 복지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이 ‘동정’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내는 방식의 복지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서라는 그럴싸한 명목을 내걸면서 말이다.
복지는 수혜자를 고려하는 체계와 배려가 필요한데, 불쌍하니 챙겨주겠다는 동정에는 그런 것이 없다. 정부는 자신들이 자선단체가 아니라 국민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국민에게는 조건부 자선이 아니라 진정한 복지가 필요하다.
복지의 사전적 의미는 ‘행복한 삶’이다. 정부의 복지 정책이 국민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지를 누리고자 자신의 결핍과 괴로움을 인정하고, 또 인증해야 한다면 과연 그 어떤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까. 국민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손을 뻗는 복지, 국민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복지여야 한다.
지영의. 2016.11.25 인권연대 청춘시대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