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가 성황이었던 적이 없다. 학교 운동장과 어지간한 체육시설은 문을 닫은 지 오래고, 유치원과 학교 문은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다. 저마다의 교실을 떠난 아이들이 오롯이 단지 내 놀이터로 모여든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 남아와 여아,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 이 작은 놀이의 터전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과연, 마을 공동체에서 놀이터가 이토록 크게 쓸모 있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놀이터의 유례없는 성시 속에서 ‘깍두기’란 존재가 쉽사리 눈에 들어왔다. 어찌 밥상 위의 ‘깍두기’가 아이들 놀이판에까지 침투해 있는가. 지금이야 깍두기가 밥상에서 크게 환영받는 반찬이지만, 원조 깍두기의 유례를 알고 보면 쉽사리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본래 깍두기는 배추김치의 속으로 쓰고 남은 무를 활용해 담근 무김치의 일종이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식재료를 소진할 요량으로 만들어진 김치, 깍두기의 그 부차적 위상이 놀이 세계의 깍두기로까지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런 신세’, 혹은 ‘편을 가를 때 짝이 맞지 않아 혼자 남은 사람’, 이것이 자연스레 놀이판 깍두기의 정체성이 된 것.
유년 시절의 골목 놀이터, 나라는 아이는 만년 깍두기 신세였다.오빠들은 저들끼리 편을 가르다가 별 쓸모도 없어 뵈는 계집애 하나가 오도마니 남아 있는 걸 보면 선심 쓰듯 말하곤 했다. “그럼 넌, 깍두기!” 계집아이는 아주 맹탕은 아니었던지, 그게 그리도 못마땅했다. 분하기까지 했다. 깍두기 주제에 불만에 가득 차서는 연신 속으로 투덜댔다. 속마음을 아주 드러낼 순 없었다. 우글대는 사내아이 무리에서 계집은 유일한 여아였고, 굼뜬 데다가 둔하기까지 했으니.
더 잘해보겠노라고, 기필코 나아지겠노라고 다짐하면서 계집아이는 처량한 신세를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잘한다’ 칭찬을 받아 깍두기에서 벗어보고자 용을 썼다. 아이는 점차 기민해졌고, 몸동작이 빠른 아이로 자라났다. 최근에 집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들추게 됐는데, 세 개 학년 체력급수가 전부 1등급으로 찍힌 걸 보고 뜨악했다. 깍두기가 되어서라도 놀이에 낄 수 있는 걸 감지덕지했어야 했던 걸까? 굳이 이런 마음이 든 건 궁금함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 탓이었다. 하찮은 계집 동생을 깍두기 노릇 시킨 건 어쩌면 동네 오빠들의 선의였을지 모른다고. 어린 나를 소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품고자 한 마음의 서툰 표현이었을 거라고.
이제는 놀이판의 깍두기를 조금 여유 있는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깍두기임이 분명한 꼬마 하나가 유독 해맑고 즐거워 보인다. 애초에 놀이 규칙이랄 건 크게 상관할 나이가 아닌 데다가, 형 누나와 동급이 되어 놀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고 자랑스러워 보인다. 그야 그저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제 마음 가는 대로 통통거리고 구르면서 명랑한 기운을 발산하면 그뿐. 그 누가 알았겠는가. 애초에 오갈 데 없는 신세의 깍두기가 이리도 크게 활개를 치며 놀이판을 휘젓게 될 줄이야!
큰 자에게 약자(어린 자)를 품을 수 있는 도량이 있고, 깍두기 저 자신이 스스로의 존엄(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한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본다. 그럴 때 ‘깍두기’란 존재는 어린 자에 대한 아량의 표시요, 수용과 용납의 방식이 될 수 있을 테다.
노는 무리 가운데 주로 나이가 한참 어린아이가 깍두기가 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이는 몇 살 덜 먹은 까닭에 놀이 규칙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노는 모양새 또한 어설프다. 이 ‘놀 줄 모르는 동생’을 놀이의 정식 일원으로 받아주기는 마땅찮고, 그렇다 해서 아주 떼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 큰 아이들은 고심 끝에 결정짓는다. 어린 동생을 그저 슬쩍 끼워는 주자고. 오직 ‘깍두기’의 이름으로.
깍두기는 여러모로 면죄부를 가진다. 놀이판에서 그만이 누릴 수 있는 나름의 특혜랄까? 아무도 그가 놀이에서 큰 활약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실수를 하거나 뒤쳐져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술래잡기에서 깍두기는 잡혀도, 안 잡혀도 그만이다. 설사 잡히더라도 굳이 술래 노릇을 시키진 않는다. 판이 바뀐다. 술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친다. 약속된 노랫말을 기계적으로 외는 동시에 재빠르게 뒤를 돈다. 깍두기는 제 몸을 우뚝 멈춰 세우지 못하고 크게 비틀거린다. 그러나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면 깍두기는 놀이판에서 언제고 봐줘야만 하는, 성가시기만 한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깍두기가 제법 놀이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엄연히 규칙이 존재함에도 깍두기의 존재 탓에 종종 예외와 변칙이 생기고, 구성원들은 보다 유연해진다. 자칫 규칙과 경쟁으로 경직될 법한 놀이판의 분위기가 깍두기의 존재 덕에 누그러지고 화합된다. 소화를 도와 속을 편케 하는 깍두기의 역할쯤 되는 듯하다.
깍두기는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도 요긴하다. 그것은 주로 이어달리기와 같이 승패가 갈리는 경기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에이스가 들어 있는 팀에 부러 깍두기를 붙여 팀 사이에 균형을 맞춘다. 양 팀의 실력차가 크게 벌어져 재미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경쟁의 양상을 조율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여타 음식과 어우러져 조화로운 맛을 내는 깍두기. 버려질 뻔한 무가 특별한 양념을 입어 기특한 맛을 내게 되듯, 놀이판의 깍두기 또한 없어서는 안 될 특별한 존재이리라.
큰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기가 죽기는커녕, 도리어 형 누나 뒤를 졸졸 따르며 겁 없이 구는 아이. 수긋한 이마를 타고 흐르는 투명 땀방울이 말하고 있었다. '나 지금 세상 걱정일랑 하나 없이 원 없이 뛰놀고 있노라'라고. 선선한 가을바람 한 자락이 찾아와 아이의 젖은 머리칼을 훑고 지나간다. 아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문득 놀이터 벤치 옆자리에 앉은 아이 엄마에게 말을 걸고 싶어 진다. 혹시 깍두기 노릇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 역량과 성취가 기준이 되는 세상에서 깍두기로 놀아본 경험이 얼마나 큰 힘인지 아느냐고. 부족하고 서툴러도 기꺼이 받아들여진 경험, 그것이 주는 위안과 격려는 제법 크노라고. 세상을 향한 신뢰를 아주 저버리지 않게 되며, 결국 못난 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지 않겠느냐고.
위기다. 놀이 문화의 변화와 함께 깍두기의 존재가 위협을 받는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돼 보이는 큰 아이들은 손바닥 위 작은 기기에 두 눈알을 고정시키고 좀처럼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줄 모른다. 함께 놀고 싶어 안달 난 깍두기 하나가 제 주변을 서성이는 줄을 알까, 모를까. 작은 아이는 이런 생각을 품고 있으리라. ‘나도 형아 나이가 되면 저걸 할 수 있겠지? 지금은 어려서 깜냥이 안 되는 거잖아.’
아이는 곧 놀이터 울타리를 벗어나 비교와 경쟁이 난무하는, 치열하고 살벌한 세상을 마주할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대개가 이해관계에 의해 맺어지는 철저하고 냉정한 사회리라. 이런 세상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깍두기로 놀아본 경험이 절실하다. 결코 가벼울 수 없는 깍두기란 존재가 아이들의 놀이판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까 마음이 조마하다.
내가 밥상 위 깍두기를 선호하는 까닭은 요즘 들어 부쩍 소화력이 달리는 탓이요, 놀이판의 깍두기에 목을 매는 것은 나이깨나 먹었으나 여직 별 신통한 구석이 없기에, 그런 나를 세상이 조금은 너그러이 받아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골목을 부지런히 내달리던 나라는 어린 날의 '깍두기'는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꽤나 당돌한 것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