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깍두기

by 서지현
빨강 파프리카로 맛과 색을 낸 깍두기


가을무 앞에서 나는 어느 정도 흥분 상태가 된다. 눈앞의 단것들에 하릴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어린아이 같달까? 마침내 땅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이 가을철 뿌리채소의 대표주자 앞에서 기쁨과 설렘으로 정신이 잠시 혼미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을무가 나오기만 하면, '얼씨구나!'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깍두기를 담근다. 김치 담그는데 필요한 양념 일색이 주방에 구비되어 있는지 미처 돌아볼 겨를이란 없다. 그저 아이처럼 신이 나서는 깍둑깍둑 무부터 썰고 본다. 너무 크지 않은 무 하나에 굵은소금 한 스푼을 뿌려 조물조물 손으로 버무려 놓고 나면 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비로소 음이 차분해지면서 차근차근 양념 준비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무가 절여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용된다는게 새삼 다행스럽다. 40분 가량. 그 정도 여유면 양념 재료가 한두 가지 없다 해도 집 앞 슈퍼로 냉큼 달려나갔다 오기에 충분 테니까.



가래떡엔 깎두기가 찰떡입니다



가을무는 물이 많고 단 데다가 '아삭아삭' 시원스럽게 씹히는 식감이 좋아 먹는 재미가 더하다. 게다가 무는 생으로 먹어야 효소가 파괴되지 않아 소화에 도움이 된다 하니, 결국 깍두기의 맛이란 미식과 영양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기특한 맛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턴가 깍두기는 가을 겨울철이면 우리 집 밥상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밤고구마나 가래떡같이 목메는 간식을 먹을 때는 깍두기를 반드시 곁들이로 낸다. 사골국이나 미역국처럼 다소 비리고 느끼한 국물 음식에도 깍두기는 필수다. 젓가락으로 무만 집어 야물게 씹어도 좋지만, 숟가락으로 무와 함께 양념국물을 떠올려 보시라! 음식 맛의 텁텁함과 느끼함 을 청명하게 훑고 지나는 깍두기 국물의 대범한 기세에 그만 뻥 뚫리고야 말 테니까.





올 가을도 어김없이 깍두기를 담갔다. 보통은 고춧가루가 주 양념이지만, 아이들 먹일 용으로는 고춧가루 대신 빨강 파프리카를 갈아 양념으로 썼다. 배율만 알맞다면 파프리카만으로도 충분히 곱디 고운 붉은 빛깔을 낼 수 있다. 게다가 파프리카는 엄연히 고춧과의 채소가 아니겠는가. 알싸한 맛은 없지만 고춧과의 명성답게 적당히 매콤한 향미를 풍겨 미각을 만족시킨다.



사과를 무와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썰어 넣어 단맛을 더했다. 단, 사과는 며칠 사이에 쉽게 무르니 빠른 시일 내에 소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다가올 추운 계절, 날마다 마주하는 밥상 위에서 깍두기의 덕을 얼마나 크게 누리게 될까? 적당한 추위 속에서 날마다 색다른 맛과 질감으로 익어가는, 그래서 매끼 새로 젓가락을 댈 때마다 어떤 맛이 들었을까 기대하게 만드는 가을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깍두기처럼 익어가면 어떨까 하고. 여간 큰 세파와 시련이 아니라면 무작정 움츠러들지만 말고 조금 대범하게 맞서보자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아 본다. 누가 알겠는가? 깍두기와 닮은 꼴로 익어간다면 전에 없이 여유 넘치고 노련한 모습으로 조금 더 성숙해져 갈지. 그렇게만 된다면야 나 자신도 밥상 위에서 환영받는 깍두기처럼 어디서든 살뜰하게 제 맛을 낼 수 있으리라. 풀릴 길 없는 사람들의 답답한 속을 때때로 뻥 뚫어주기도 하면서.



# 저의 부족한 글을 읽고서 퍼뜩 아이를 위해 파프리카 깍두기를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지 모를 독자를 위해 제가 사용한 깍두기 양념 레시피를 적어 보았습니다. 레시피는 작은 무 2개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천일염 두 스푼으로 40분간 절임

무를 씻지 않고 소금물기만 뺌

쫑쫑 썬 파와 함께 양념에 버무림



<양념>

빨강 파프리카 1개반~2개(크기에 따라 조절할 것)

새우젓 1.5큰술

액젓 1큰술

다진마늘 1큰술

다진생강 0.5큰술

매실청2큰술

찬밥 반공기(밀가루풀 대체 가능)

사과즙 반포(배조각 가능)

썰고 남은 무조각


위의 양념 재료를 믹서에 갈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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