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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Dec 10. 2023

1인분의 살림을 감당한다는 것

남의 집을 청소합니다(2)

그녀는 나를 믿고 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매번 그녀가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 청소를 해 줬다. 막힌 세면대나 변기 뚫기와 같은 차마 남에게 부탁하기 어려운 것들이야말로 그녀에겐 정말로 필요한 일일지 몰랐으니까. 그녀의 뒤를 봐준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녀는 일주일에 꼭 한 번은 청소를 맡겼다. 보통은 3. 4일 전 카톡으로 일정을 물었고,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조율했다.



갑작스러운 부탁도 종종 있었다.

'제가 요즘 야근이 많았어요. 강아지도 잘 돌보지 못해 애기가 스트레스가 있었는지 어젯밤 이불에 실수를 했더라고요. 혹시 오늘 좀 와주실 수 있으세요? 집 앞에 빨래방이 있어요.'

대개의 경우 거절할 이유란 없었다. 시간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데다 그녀 집은 내가 주로 글을 쓰는 카페에서 고작 10분 거리에 있었으니까. 그녀 집에 들러 한 시간 바짝 청소를 하고 나면 오히려 글 쓰는데 활기가 돌았다. 모르긴 몰라도 나는 그녀 가까이에서 항시 대기조로 있는, 이웃해 사는 친한 언니 역할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익명으로 만났지만 그녀의 공간을 갈무리하면서 본의 아니게 그녀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선반 위 주민등록증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과 나이를 보았고,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격증을 통해 그녀가 어떤 업에 종사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쌓이는 배달음식 쓰레기는 그녀가 집에서 밥 한 끼 지어먹을 여유가 없음을, 여기저기 흩어진 약봉투와 알약은 그녀의 건강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OO님, 바쁘시겠지만 한 끼라도 집에서 밥 지어드세요. 수납장 정리하다 보니 쌀도 종류별로 많이 사다 놓으셨던데..."

"아, 네 그래야 되는데 너무 바빠서 뭘 잘 못 해 먹어요."

"오지랖인 줄은 알지만 동생 같은 마음이 들어 한 마디 드렸어요."

"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미국행이 결정되었다. 당장 그 주 금요일까지는 방을 빼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오셔서 짐 정리하는 것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어머, 그렇군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미국 가서 사업을 하게 됐어요."

"괜히 서운하네요. 이번주 우리 시간 한번 맞춰 봐요."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일 시작한 날 대면 이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채팅창으로 숱한 메시지와 사진을 주고받은 덕에 우리는 이미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유독 희고 동그란 얼굴을 가진 그녀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한참 어려 보이기만 한 그녀가 저 멀리 이국에 가서 잘 해낼 수 있을지,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지난번에 조언해 주셔서 이번주에 부지런히 당근에 올렸는데요, 못 판 것도 많아요. 나머진 다 버리고 가려고요."

"잘하셨네요. 그럼 버릴 것들 이 비닐에 담아 일층에 내려놓을까요?"

각오는 했지만 그날 정말로 많은 식료품과 생활용품이 버려졌다. 나눔도 하고 판매도 하고, 시간만 충분했더라면 새 쓸모를 도모할 수 있었을 아까운 물건들이 많았다.



"이 주방세제랑 세탁세제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직 한참 남아 있는데."

"그건 세면대나 변기에 부어서 버려주세요."

"네? 그럼 안 되죠! 차라리 제가 챙겨 갈게요."

"아..안 되는 거예요?"

"안 되죠, 그럼! 지구가 어떻게 되겠어요......"

놀라다 못해 화를 내다시피 하는 나의 반응에 그녀는 금세 풀이 죽어 말꼬리를 흐렸다. 이처럼 지구에 대해 깍듯한 면이라곤 조금도 없는 이가 과연 사람과 자연에 무해한 사업을 펼칠 수 있을지, 나는 도통 그녀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해요. 몇 달 동안이지만 항상 집 깨끗하게 해 주셔서 진짜 감사해요. 오늘 무거운 거 들고 왔다 갔다 많이 힘드셨죠. 집에 가서 시원하게 씻으시고 저녁밥 챙겨드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역 안, 그녀는 마지막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OO씨, 미국 가셔서는 꿈도 사업도 좋지만 무엇보다 몸 잘 챙기세요. 1인분의 살림을 해낼 수 있다면 무얼 하든 잘 될 테니까요.'라고 회신하고픈 마음을 꾹 억눌렀다. 적어도 그녀와 암묵적으로 맺은 알바 계약에 따르면 그런 내용을 충고할 만한 권리가 내겐 없었으니까.



그 순간 메타인지가 슬슬 발동하는 걸 느꼈다. 주부로 살면서 1인분의 살림을 넘어 무려 4인 가족을 돌보는 주부의 삶을 당연하게 여겼었다. 자신과 가족, 거기에 주변을 갈무리하는 돌봄의 역량이란 우습게 볼 게 아니었어. 게다가 꿈을 놓지 않고 있잖아. 그래 잘하고 있어, 충분히 잘하는 거야. 그나저나 일주일에 한두 번 맘 편히 일하면서 괜찮은 시급에 큰 깨달음까지 얻게 됐으니 이거야말로 꿀알바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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