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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Dec 25. 2023

성탄과 말구유

낮아짐의 미덕, 겸손의 능력

아주 어릴 적 부모님께서 소를 키우셨던 탓에 축사에 관한 기억이 몸속 깊이 배어 있다. 오직 사육과 길들여짐의 질서 속 축축한 기운과 천연덕스런 소똥 냄새가 아우라를 두르던 그곳은 조금도 오래 머물고픈 공간이 아니었다.   

    


하루 중 축사의 마지막 일은 소들에게 물을 먹이는 일이었다. 나는 겨우 다섯 살 먹은 꼬마였지만 제법 대범한 면이 있었다. 자기가 소에게 물을 틀어주고 갈 테니 엄마는 먼저 집에 들어가라 했다는 것이다. 소들은 한 줄 가로로 늘어서 있었고, 여물통은 소들의 주둥이를 따라 하나로 길게 연결돼 있었다. 축사 어귀에 있던 수도꼭지를 틀면 물은 여물통을 타고 느리게 흘러갔다. 한참을 기다리고 서서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나면 맨 마지막 소가 겨우 물을 먹었다.



물 한줄기가 제 앞에 흘러들어오기가 무섭게 긴 혀로 여물통을 핥아대던 순한 가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여물통은 먹이를 달게 핥느라 흘리던 가축의 침과 함께 낮에는 건조하고 푸석한 여물이, 간간이 소들의 목을 축이는 물이 담기던 가장 추하고도 신성한 밥통이었다.



‘저 육축 소리에 아기 잠깨나 그 순하신 예수 우시지 않네 –찬송가114, 그 어린 주 예수 中에서’



세상을 구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이 그토록 쿰쿰한 마굿간, 말구유 위에서 태어나셨단다. 품위 있고 권위 있게, 어디 화려한 궁전이나 부잣집 대궐에서 나시지 않고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곳, 말 밥통에 뉘여 첫 울음을 울었다. 교만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타락, 예수님은 오직 겸손으로 그것을 회복시키려 하신 것. 말구유에 태어나 일평생 낮은 자의 삶의 사신 예수는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셨다.



성탄의 밤이 깊어간다. 낮아짐의 미덕을, 겸손의 능력을 더욱 새겨보는 거룩한 밤이다.

Happy, hol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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