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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Feb 17. 2024

세탁기를 모시고 사는 사연

우리 집 별난 통돌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흰 빨래, 검은 빨래, 양말류, 수건. 유독 볕이 좋은 날엔 이불 패드와 베갯잇, 운동화도 빤다. 세탁 종료음을 따라 다 된 세탁물을 끄집어내지만 빨래의 끝은 종종 요원하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는 빨랫감이 줄줄이인 탓이다. 주어진 생활을 살아내느라 우리의 삶은 숨 가쁘고 세탁기는 쉼 없이 돌아간다. 그리고 오늘은 제법 별난 구석이 있는 우리 집 세탁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릴 참이다.



우리 집 네 식구 빨래를 책임지는 돌쇠, 통돌이. 이 집에 머문 햇수대로 올해 9년 차 쓰임에 접어들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는 건 사람이나 기계나 매한가진지 갈수록 기능이 예년만 못하다. 세탁 단계에서야 '우웅- 우웅' 소리를 내며 일정한 박자로 돌아가는 게 순조로운 모양새지만, 탈수 동작에 들어서기만 하면 '털털털털' 몸체를 심하게 떤다. 영락없이 경운기가 시동 걸릴 때 나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이 영 불안하다.



통 속 빨랫감들이 심하게 뒤엉켰을 때의 떨림은 가히 위협적이다. 괴성을 동반한 진동이 점차 고조되다 끝내 절정에 이를 땐 지축이 흔들린다. 그때의 요란 살 떨리도록 살벌한 것. 거대한 몸집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폭파 직전의 위기감이 온다. 제가 놓인 곳이 위아래로, 또 양 옆으로 연결된 여느 공동주택의 한 구석이란 걸 아나 모르나. 이 집에 사는 두 꼬마도 때때로 부모 눈치를 살피며 뒷발꿈치를 드는 마당에 그 타고난 뻔뻔함에 기가 찰 노릇이다.  



빨래 뒤엉킴은 통돌이 세탁의 최고 골칫거리다. 빨래추가 겨우 몇 번 도는 걸 동력 삼아 꼬이기 시작한 빨랫감은 무서운 속도로 한데 뒤엉킨다. 심판이 떼어놓기 무섭게 상대 몸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매트 위 레슬러들처럼 저돌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빨래 뒤엉킴의 주범은 옷가지들의 팔소매, 다리라는 걸 알았다. 나는 시시로 레슬링 심판처럼 나서 세탁기 뚜껑을 열고 꼬인 세탁물을 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한 덩어리 괴생명체를 제때 다루어주지 않으면 더 이상의 평범한 세탁은 기대할 수 없어서다. 한데 뭉쳐 무거워진 빨랫감의 무게중심은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마련. 탈수가 시작되는가 싶으면 세탁추가 턱 풀리고 세탁조에는 하릴없이 물만 찬다. 심판의 개입이 없다면 돌고 돌고 한없이 돌게 될 나이 찬 빨래 기계의 숙명이란. 언제라도 문을 열고 개입할 여지가 있는 통돌이의 기능이 새삼 고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 세탁기는 반자동이다.


       



오늘도 마음을 써 가며 하루치 빨래를 마쳤다. 옷가지 하나하나를 탁탁 털어 건조대에 펼쳐 넌다. 가는 건조대 살에 걸린 아이 옷의 팔다리가 훌쩍 길어나 있다. 반듯하게 널린 옷감들처럼 이때껏 구김 없이 자라난 아이들이 그저 고맙다.



언제 이렇게 자라난 걸까. 이리저리 따져 봐도 대단한 공을 들인 적이 없는데. 매 끼니 아이가 비워낸 식기를 닦아내고, 매일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고, 시시콜콜 그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준 것. 그것이 전부인데. 그저 변변찮은 통돌이 통을 붙들고 남몰래 씨름하는 사이 아이는 그렇게 성큼 자라난 것일까?



통돌이를 속 편히 부리던 날들이 무색하게 이제나 저제나 퍼져버릴까 조마한 마음으로 통돌이를 모신다. 수리 기사가 다녀가도 뾰족한 수가 없고, 새것을 들이기엔 시기가 마땅치 않다. 제발 이사 때까지만 버텨 다오, 때마다 염원을 하는 수밖에.



기계 세탁의 고충을 두고 크고 작은 불평불만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어쨌거나 세탁조 앞에서 어깨를 구푸푸리고  엉킨 옷감을 꾸역꾸역 풀지 않았더라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의 팔다리의 길이를 여실히 실감하지 못했을 테니. 통돌이야, 네가 우리집 아이들을 나와 함께 키워내고 있구나. 내내 우리 식구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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