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면 공기 중 먼지 농도를 체크하는 게 어느덧 일상이다. 미세먼지 농도 4, 초미세 1. 대기질에 촉을 세우며 살아온 이래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수치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여기가 한국 맞나, 하는 것이었다.
대기를 부유하던 수만의 미립자가 여러 날 내린 비로 말끔히 씻겨 내려간 모양이었다. 그 위에 내리쬔 오월의 햇살은 사심없이 맑고 투명했다. 애정을 듬뿍 담은 애인의 미소처럼 따사롭기까지 했다.
자연은 날씨의 작은 변화에도 울다 웃다 움츠러들었다 활개를 쳤다 하는 한낱 미약한 피조물에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모든 은총을 베풀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어제는 일 년 열두 달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완벽한 일기였다.
벌써 아까시가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나. 우리 아파트 뒤안길이 꿀의 향내로 충만했다. 경쾌한 음악에 절로 춤사위가 나듯 내딛는 발걸음마다 가볍고 활기가 돈다.
걷고 걸어도 곤하지 않은 날. 문득 박경리 선생의 <토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유년의 옷을 막 벗고 어른으로 향해가는 길상이 봄의 기운에 취해 공중을 부유하듯 내달리던, 읽는 이의 가슴을 부풀게 했던 바로 그 장면이. 별안간 그날의 길상의 심정이 깨달아지면서 마음이 자꾸만 간지러워지는 것이었다.
봄비에 말갛게 된 오월의 대기처럼 내 마음도 그랬다. 차곡이 쌓여온 피로와 우울의 그림자가 단박에 씻기며 새 살이 돋는 실감이 났다.
무엇이든 명목 삼고 핑계 삼아 종일 걷고 또 걸었다. 걷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벽한 오월의 어느 봄날을 기리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