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여행 중에 발견한 '빛나는' 보통의 날들
'밑반찬을 만드는 보통의 살림으로 돌아가고 싶다'
맥락 없이 '밑반찬'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한 건 미국 서부 여행이 중반으로 치닫을 무렵이었다. 여행의 여정은 길었고 살림의 공백기도 컸다. 자연히 나는 매일 세끼 밥상을 차리고 두 아이의 도시락을 싸는 주방일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있었다.
며칠간은 자유부인의 여유가 좋았다. 서부 도시의 비싼 물가를 감수하면서도 매일 느긋하게 조식을 즐겼고 발길 닿는 대로 현지식을 했다. 그러다 외식이 입에 물리면 현지 마트에서 장을 봐다가 숙소에서 가볍게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다 곧 집밥이 고파졌다. '집밥 총량의 법칙' 같은 게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라도 집밥을 좀 먹어줘야 힘이 나고 안정이 되는 그런 상태 말이다. 안타깝게도 집에서 챙겨온 반찬은 얼마 안 까 떨어졌다. 비행기를 타고 서부로 건너오는 바람에 먹거리를 넉넉히 챙기지 못했던 것인데, 여독이 심한 날과 컨디션이 크게 떨어진 날 야금야금 꺼내 먹다 보니 금세 동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아이의 몸 상태도 심상치 않았다. 고된 여정으로 면역이 떨어진 탓인지 녀석의 오랜 지병이 도지고 있었다. 아이에게 손수 밥을 지어먹이고 싶다는 바람이 집밥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나는 어김없이 유튜브 채널을 틀었다. 여행지 추천 맛집을 검색하려는 의도가 아닌 그저 밑반찬이 고파서였다. 알록달록한 식재료와 유튜버의 노련한 손놀림에 시선이 사로잡혀 며칠을 굶주린 사람마냥 다급하게 영상을 훑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요리사의 손길 아래 때깔 좋은 반찬들이 하나 둘 완성되기 시작했다. 꽈리고추를 넣어 동글동글 뽀얀 메추리알을 조리는 장면에서는 달콤 짭조름한 간장내가 났다. 투명하게 삶아진 통통한 콩나물에 참기름을 한 바퀴 휘 둘러 설설 무치는 모습에는 그만 손가락을 갖다 댈 뻔했다. 매콤하게 졸여낸 감자조림과 쫄깃한 멸치볶음, 포실한 두부조림을 눈앞에 두고는 뜨끈한 쌀밥 한 그릇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다 된 반찬들이 동일한 사이즈의 용기에 차곡히 담겨 말끔한 식탁 위로 착착 놓이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나 아름다운 장면일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여행이라는 커다란 자유에 묶여 당장 범접할 수 없는 그 고귀한 보통의 노동이 나는 부럽고 그립기만 했다. 무슨 대단한 요리가 아니요,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가능했던 소박한 조리가 내겐 그리도 멀고 아득한 일이기만 했다.
바보 같이 나는 여행 내내 밑반찬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순히 여행에 지쳐서라던가, 아이가 아파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시 샌프란의 낭만과 운치에 빠져들수록, 황량한 사막의 한복판에서 세속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게 될 때, 캐년(Canyon)과 국립공원, 그 거대 자연의 장엄 앞에서 하릴없이 작은 나를 보았을 때, 자신과 내 보통의 일상이 더없이 각별하게 다가왔다.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한꺼풀 벗겨지는 실감과 함께 소중한 일상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왔다. 그래, 밑반찬을 떨어지지 않게 해야 겠어!
누군가에겐 내 사고의 흐름이 조금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주방 살림을 도맡아 하는 내게 밑반찬은 그런 존재였다. 식단의 기본기이자 든든한 밥상 지원군. 만일을 위한 대처이자 기대어 안심할 수 있는 대상. 그리고 서부 여행 중 다진 밑반찬 결기는 주어진 삶을 단단히 다지겠다는 다짐이요, 보통의 흔들림 없는 일상을 이어가겠다는 작은 의지의 발로였다.
언뜻 미국에서의 상차림이란 밑반찬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고 그 탓에 몸을 사려왔었다. 사실 된장, 고추장, 간장이 항시 구비돼 있으니 얼마든지 나물을 무치고, 장조림을 하고, 저장음식도 만들 수 있는 것을. 현지의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색다른 밑반찬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나의 마음가짐은 조금 달라져 있다. 긴 열병 끝 되찾은 건강이 더없이 애틋하다. 다시 찾은 일상이 고맙기만 하다. 밑반찬 두어 가지를 올려 구색을 맞추는 매일의 밥상이 귀하다. 미국 서부의 너른 품안에서 작지만 반짝이는 평범한 날들의 가치를 잘 배워 돌아온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