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받은 하루'의 포장지를 푸는 시간
'아침밥'과 '조식'이라는 단어에서는 각기 다른 냄새가 난다. '아침밥'이 구수하고 비릿한 밥내음이라면 '조식'은 잘 구워진 빵과 갓 내린 커피의 향긋함이다. '아침밥'이 보글보글 막 끓어 나온 된장국의 익숙한 냄새라면, '조식'은 서너 가지의 신선한, 혹은 이국적인 재료가 한 그릇에 세련되게 올라 호기심과 식욕을 돋우는 싱그러운 향이다.
'아침밥'을 짓는 일은 영원히 나의 몫인 것만 같다. '아침밥' 소리를 들으면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군말 없이 주방으로 달려가 쌀을 씻고 밥물을 잡아야 할 것 같다. 반면 '조식'이란 단어 앞에서는 몸과 마음이 무장해제 된다. 집 아닌 어느 쾌적한 공간에서 누군가 내어 올 음식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한껏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이 연상된다. 언제부터 '아침밥'과 '조식'을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단어가 어감과 뉘앙스의 차이를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서부 여행 내내 나는 매일의 조식을 고대했고, 또 그 시간을 원없이 즐겼다. 사실 미국식 조식이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어딜 가나 계란을 주재료로 삼은 메뉴가 눈에 띈다는 사실. 계란이 'Two eggs', 'Three eggs' 하는 식의 기본 요리로, '오믈렛'이나 '오므라이스', '프렌치토스트'의 주 재료로, 그것도 아니면 '브리또'의 속재료로 다양하게 연출되는 게 흥미로웠다.
계란 요리에 약간의 신선한 채소 과일을 곁들인 조식은 가볍고 산뜻했다. 오히려 조금 부족한 듯 마무리되는 식사가 나는 좋았다. 내 앞에 놓인 소박한 식단, 그 너머로 아침의 선선한 공기를 느끼고, 식당 분위기와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여유를 얻었다. '커피를 좀 더 채워드릴까요', '음식 맛은 어떠세요',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묻는 서버의 다정함에 우리의 식탁이 한결 풍요로워지는 걸 느꼈다.
약 2주에 걸친 서부 로드트립의 피로도는 상당했다. 나는 매일의 조식이 건네는 여유 속에서 기운을 차렸고 ,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된 실감으로 새롭게 주어진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이전과 다름없이 주방에 섰을 때 나는 더는 '아침밥'이 아닌 '조식'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를 잘 지어먹여야 한다는 의무와 부담을 내려놓고 스스로 설레는, 단출하지만 알찬 식단을 꾸리고 싶어졌다. 여행의 긴 여정 중 누린 아침 식탁의 좋은 기운이 내 안에 내내 머물고 있는 탓이었다.
나의 아침이 전에 없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냉장고엔 늘 처리해야 할 잔반이 남아 있었지만, 아침 식단만큼은 그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조식 준비는 좋아하는 음식과 시도해보고 싶었던 식재료를 떠올리는 일로 시작했다. 그 자체로 나는 커다란 즐거움을 느꼈다. 보다 손쉬운 조리법을 고민하는 일도 조식 만들기의 주요 요소였다. 예쁜 식기와 상차림에 관심 많은 딸아이가 플레이팅에 합세했다. '호롱호롱' 노래하는 아침새처럼 명랑한 아이가 곁에서 한없이 조잘대기 시작했다. 완연한 봄같은 아침이었다.
마음에 깃든 여유와 함께 식탁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하루 시작을 앞둔 시간, 식탁에 둘러앉은 부푼 마음들이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는다. 하루의 첫 끼니란 몸에 영양을 채우는 일 이상의 일임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평소라면 아침 밥상을 물린 뒤 '이번 끼니도 잘 해치웠네' 생각했을 테지만, 도리어 '참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감사와 안도가 밀려들곤 했다.
나는 언제까지나 조식을 차리는 사람이고 싶다. 소박하지만 다정한 조식을 짓고, 아침이 선사하는 고요와 여유를 오래도록 받아누리고 싶다. 아침식사 시간은 '선물 받은 하루'의 포장지를 푸는 일, 그 설렘과 달콤함을 놓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