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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바잉 런치'

학교에서 경험하는 '미국의 맛'

by 서지현

도시락 순항 중에 이변이 생겼다. 돌연 딸아이가 '바잉런치(Buying lunch)'을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엄마, 나 미국 급식 못 먹어 보고 한국 가면 후회할 거 같아. 내일부터 바잉런치 할래!"

학년 마무리를 겨우 8일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평소 아이는 한 번씩 스쿨런치를 먹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었다. 그럼에도 아이의 뜻을 적극 수용하지 못했던 건 '아무래도 집에서 싸 간 도시락이 낫지' 하는 생각과 급식을 먹기 위해 필요한 행정 절차를 밟는 일이 꽤나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는 주저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학교생활 관련 비용 지불 앱, '마이스쿨벅스(My schoolbucks)'를 깔았다. 달러 충전을 시도했지만 아이 정보가 등록되지 않았다. 행정적 오류였다. 결국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아이 손에 들려 보냈다. 현금 결제가 통할지 미지수였지만 아이는 '친구들이 자신들이 안 먹는 채소라도 나눠 줄테니 걱정 말라'며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미국 스쿨 런치, 학기 마무리를 앞둔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온 아이의 입에서는 바잉런치를 향한 찬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엄마, 현금으로 사 먹었어! 3달러 얼마밖에 안 하는데 완전 뷔페였어! Part of lunch에 해당하는 메뉴는 다 공짜야. 메인 메뉴인 피자랑 샐러드, 그러니까 샐러드도 채소가 완전 싱싱한데 토마토랑 치즈까지 곁들여져 있고, 선캡이라는 얼음 들어간 주스랑 우유... 참, 바닥에 블루베리가 깔린 요거트도 있었는데 그건 못 먹은 거 있지. 암튼 엄청 배부르게 잘 먹었어! 나처럼 맨날 도시락 싸 오는 친구도 오늘 내 런치 보더니 당장 엄마한테 말해서 낼부터 사 먹을 거래!"



줄줄 쏟아져 나오는 아이의 말에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

'그러니까 내... 내가 그동안 뭘 한 거지?'

아이의 증언대로라면 이토록 푸짐하고 값싼 스쿨런치이건만, 어찌 우직하기만 한 난 밤낮없이 메뉴 고민에 시달리며, 새벽마다 무거운 몸뚱이를 일으켜 꾸역꾸역 도시락밥을 지었단 말인가.



"근데 왜 그동안 바잉런치 메뉴가 부실하다고 그랬어?"

"그건 애들이 메인메뉴에 달려 나오는 음식을 잘 안 받아와서 잘 몰랐던 거야. 샐러드랑 채소 같은 거, 받아와도 안 먹고 함부로 버리는 애들이 많거든."

어떤 음식이든 가리는 일 없이 잘 먹고, 다양한 채소 맛을 즐길 줄 아는 딸아이에게 미국 스쿨런치는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였다. 적어도 스쿨런치는 교육청에서 제시한 스쿨런치 영양성분표의 내용을 고스란히 포함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제라도 스쿨 런치를 시도한 게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 학교 끝나는 날까지 계속 바잉런치 할래. 엄마, 매일 메뉴 좀 확인해 줘."






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면 급식 먹을 생각에 마냥 설렌다고 했다.

"엄마밥이 좋았지만, 사실 메뉴가 돌고 돌다 보니 살짝 질리기도 했어."

"점심 먹을 때 반찬은 술술 넘어가는데, 그렇게도 밥이 안 넘어가더라. 나 미국 체질인가 봐."

아이는 뒤늦게 도시락 후기를 전하며 슬쩍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아차 싶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도시락통 하나를 비우자면 점심시간으로 주어진 20분이 짧디 짧았을 터인데, 여간 꼭꼭 씹지 않고는 목 넘김이 어려운 밥알이라니, 아이는 오죽 힘이 들었을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는 바잉런치를 이어갔다. '타코'가 메인으로 나온다는, 그게 그렇게 인기가 없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 온다는 날에도 아이는 용기를 냈다. 타코 말고도 샌드위치랑 샐러드도 나온다 하니 걱정 마요, 하면서.





지난주 미국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EOG(End Of Grade) 시험이 끝난 뒤론 아이의 가방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책가방 대신 소풍 가방을 들쳐 매고 집을 나섰다. '오늘 경험하게 될 미국의 맛은 무엇일까' 기대하며 아이는 소풍을 떠났다.



나의 '1년 도시락 싸기' 완주 일정은 예기치 않게 끝나 버렸지만, 어쩌면 아이가 미국 식문화를 즐겁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ESL 수업의 도움을 받아가며 기본 수준의 영어를 익히고, 교과목 수업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외국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게 된 것만큼이나 값지고 의미 있는 결실일지 모른다고, 이 미련한 엄마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는다.



<제목 사진출처: iStockphoto.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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