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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1년 싸기

도시락 여정을 완주하고 싶다

by 서지현

등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중학생 아들은 연일 김치볶음밥을 주문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도시락은 틀림없이 '김뽂(아들은 김치볶음밥을 이렇게 부른다)'이어야 했다. '매일 똑같은 메뉴가 지겹지도 않느냐' 묻는 말에 아들은, '엄마, 내가 김뽂 먹을 생각에 그 힘든 시간들을 견뎌' 라고 했다.



적당히 매콤한 김치볶음밥을 한 숟갈 입에 떠 넣으면 그 즉시 모든 시름과 스트레스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걸 먹고 나면 남은 두어 시간쯤 거뜬히 버텨낼 힘이 생긴다고. '엄마밥이 없었더라면 어쩌지 못했을 거야. 도시락은 생명줄이야' 하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아들에게 미국 학교 생활은 힘에 부치는 날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아직 6학년, 초등학교 맏형이 되어 큰 즐거움을 누릴 시기에 외국 중학교로 건너와 담임 선생님도, 홈룸도 없이 매 시간 교실을 옮겨 다니며 하루의 일정을 치러내는 일은 아이에겐 갑자기 닥친 시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와중에 한낱 김치볶음밥이 생명줄 노릇이라니, 나는 집 김치가 동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고, 매일 아침 군말 없이 김치를 볶는 일 외엔 달리 아이를 응원할 길이 없었다.







딸아이는 예쁜 도시락밥을 원했다. 아이의 도시락은 처음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면 여러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했다. 아이가 싸 간 밥이 결코 특별하거나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미국 학교의 급식은 식사인지 인스턴트 스낵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헐거운 음식이 일회용 용기에 얹어 나오는데다, 집에서 챙겨 오는 도시락마저 시판용 도시락 키트나 샌드위치 수준의 간편식이 대부분이니, 단정한 통에 짜임새 있게 담긴 한국식 도시락은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할 터였다.



K-푸드에 대한 인지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도시락의 단골 메뉴인 김밥, 주먹밥(rice- ball), 볶음밥 등은 이미 이곳 아이들에게 친숙한 메뉴였다. 언젠가 눈으로 보았던 음식을 두고 'I wanna try'를 '속삭이는' 친구들이 많았다. 굳이 '속삭이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개인이 싸 온 음식을 나눠먹을 수 없는 미국 학교의 규정 탓이다. 딸아이는 한국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번번이 뿌리치기 어려워 어느 날은 김밥 한쪽을, 또 어느 날은 주먹밥 하나를 가만히 친구 손에 쥐어주곤 했단다.



딸아이의 도시락이 입소문을 타던 중에 '캔아이해브섬씨스터즈(Can I have some sisters)'가 나타났다. 5학년 언니 셋이 아이를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그날의 도시락 메뉴를 힐끔 보고 지나가길 여러 번, 서로 낯이 익은 후엔 'Can I have some...?' 하며 두 손을 곱게 모아 내밀더란다. 딸아이가 김밥 한 알을 건넸고, 그것을 맛본 한 언니가 'Finally I had a Korean food!'를 크게 외쳐 선생님께 들킬까 맘을 조렸다는 에피소드다.











두 아이 모두 학교 생활이 유연해 지면서 저마다의 도시락 취향이 생겼다. 그 요구는 놀라우리만치 제각각이었다. 아들은 '푸짐하고 우아한' 도시락을, 딸아이는 '단순하고 가벼운' 식단을 원했다. 아들은 '맵고 개운한' 반찬을 선호하는가 하면, 딸아이는 '순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좋아했다. 아들은 '밥은 뜨끈해야 한다'며 봄이 와도 보온도시락통을 고수했지만, 딸은 일찌감치 일반 도시락통으로 갈아탔다.



학기가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 나는 아이들 손에 들려 재랑대던 저 작은 네모 상자의 위력을 실감한다. 아이가 막막해 할 때 버틸 힘이 되어 주고, 때로는 더 깊고 풍성한 관계로의 연결고리가 되어 준 고마운 도시락.



도시락을 아이 손에 넘기고 나서도 '식어서도 맛은 괜찮을지', '식감이 달라져 있지나 않을지', '혹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을지'를 염려하던 나는 순전한 바보 엄마였다. 그것이 실은 잠시 엄마 품을 떠나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돌아와야 할 자신들을 향한 힘찬 격려요, 응원이었음을 녀석들은 알기나 할까.



변변찮은 엄마의 도시락밥을 먹으며 꿋꿋이 달려온 두 아이와 함께 내게 남겨진 도시락 여정을 완주해 내고 싶다. 그것은 운동에 서툰 일반인이 하프마라톤을 자기만의 속도로 끝까지 달리는 일만큼이나 영예롭고 값진 일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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