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차 한 잔이면 될까요?

생강고를 만들며

by 서지현
생강고를 만들며 '살림'의 의미를 생각한다.



생강고를 만들라치면 며칠 전부터 숨 고르기를 시작한다. 그만큼 품이 들고 시간이 걸리는 만만찮은 작업이라 그렇다. 굳이 말하자면 김장을 담가야 한다거나 추석, 설 명절과 같이 큰 일을 앞둔 이의 심정이 된다.



생강고를 만들며 '살림'의 의미를 생각한다. 생강으로 청을 담그거나 생강고를 만드는 일은 나와 식구들을 '살린다'는 각오와 작정이 아니면 선뜻 나설 수가 없는 일이다. 레몬이나 매실을 비롯, 여러 종류의 식재료를 가지고서 청을 담가봤지만 생강으로 만드는 저장식품에 비할 바 아니다. 재료 세척과 껍질 벗기기만 해도 보통 수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생강으로 청을 담그는 쪽은 수월하다. 생강을 편 썰어 설탕이나 꿀에 재우면 되니까. 생강고는 그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간다. 과정의 괴로움(苦)을 견뎌내야만 생강고(膏)가 가까스로 만들어진다.



올해는 생강 껍질 벗기기는 생략했다. 생강 껍질에 오히려 좋은 성분이 많기 때문이다. 대신 세척에 더욱 공을 들였다. 생강 이음새를 뚝뚝 분질러가며 꼼꼼히 솔질을 해야 흙먼지 하나까지 말끔히 제거할 수 있다. 손질한 생강을 소쿠리에 받쳐 물기를 빼낸다.



착즙한 생강원액은 생강고가 되고, 말린 섬유질과 전분은 생강가루로.



다음으로 생강을 착즙한다. 생강의 원액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착즙기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게 복병이다. 웬만큼 좋은 성능이 아니고서는 생강의 강한 섬유질을 당해 낼 수가 없다. 기계가 자꾸 멎는다. 내 마음 같지 않은 기계를 인내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분해하고, 막힌 부분을 뚫어주고, 다시 돌리고, 또 돌리고...



착즙한 생강 원액을 서늘한 곳에 두어 하얀 전분 성분을 가라앉힌다. 생강고는 맑은 윗물만 사용하여 만든다. 윗물을 냄비에 따라내고 비정제 설탕을 넣어 적당한 농도가 되도록 졸인다. 내용물이 굳은 후에는 점성이 더해지므로 이것을 감안하여 너무 되지 않게 졸이는 편이 좋다.



가라앉은 전분과 생강 섬유질은 완전히 건조한 후 믹서에 간다. 만들어진 생강가루는 생선 조림이나 고기를 재우는 등의 요리에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생강고와 더불어 천연 조미료를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른다.






생강고 한 병 만들어 두고선 남편에게 겨우내 생색을 낼 참이다. 날이 차서 몸에 한기가 든다든지, 소화가 안 된다던지, 기운이 없다 하면 단일 처방이 내려질 것이다. 도도하게 눈을 치켜뜨고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한 마디 툭 던져볼까나.

"생강차 한 잔 어때?"

볼 보듯 뻔하다. 아내로부터 '생강이 그리 몸에 좋다더라'라고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온 이 남자, 집을 들락거리며 뻔질나게 냉장고 문을 열어젖힐 테지.



매운맛이 힘든 아이들에게는 생강고는 찻숟가락으로 반 스푼이나 한 스푼만 넣고 배즙을 섞어 따뜻하게 마시게 한다. 그렇게 하면 마치 수정과나 식혜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생강향처럼 차 맛이 순해져서 달게 마실 수 있다. 순한 생강차를 건넬 때만큼은 나도 썩 괜찮은 엄마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생강고의 덕을 크게 누리는 건 나일 테지. 몸이 차고 혈액순환이 안 되는 내 몸에는 생강만 한 게 없다. 사실 커피를 즐기지만 겨울철 음료로는 부담스럽다. 뜨거운 커피를 마셔도 몸속은 냉해지는 걸 수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생강차는 커피를 대신할만한 훌륭한 음료다. 생강차에는 커피의 매력적인 향과 맛에 필적할 만한 풍미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커피가 남기는 여운까지, 감히 말하건데 생강 음료는 그에 못지않다.



겨울철 추위에 더해 미세 먼지와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올해는 건강을 위협하는 외부 요소가 늘었다. 그로 인해 쌓이는 내적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에 맞설 핵탄두급 비밀 병기가 여기 있나이다.' 몇 달간은 끄떡없을 거라고 배짱을 디밀어본다. 외부의 적들이 언제고 딴지를 걸어오면 능청스럽게 대꾸할 것이다.

"생강고 한 스푼 넣고, 알싸한 생강차 한 잔이면 될까요?"


된장도 간장도 담글 줄 모르는 반쪽짜리 주부지만 올해도 생강고만큼은 거르지 않은 게 신통하다. 생강고를 만들고 나면 나 스스로가 살림 꽤나 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제법 기분 좋은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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