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이 좋아서

by 서지현

팥에 대해서라면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한 무더기다.



일단 '팥'이라고 하면 '앙꼬 없는 찐빵'이 떠오른다. 찐빵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 그게 팥을 쑤어 만든 팥소다. 어디 찐빵뿐이겠는가? 제빵계의 황제인 팥빵에서부터 붕어빵, 호빵, 호두과자는 물론이고 여름철 간식의 대표주자 팥빙수에 이르기까지 팥을 빼놓고서는 말 못 할 부식거리가 수두룩하다. 이쯤 되면 팥은 이미 대중의 간식계를 제패한 셈인지도.






그날이 그날 같은 날들이 이어진다. 마냥 흘러만 가는 시간에 어떤 의미라도 새기고 싶어 안달이 난 지 오래다. 한 주간 무탈하게 자라준 아이들에게 주말의 기쁨을 선물하고 싶은 날, 별스런 간식을 떠올렸다. 팥소를 넣은 찹쌀 호떡을 구워보기로.




먼저 삶은 팥에 사탕수수당을 넣고 조려 팥소를 만든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찹쌀가루를 뜨거운 물로 익반죽한 후 동글동글 둥글려 새알심을 빚는다. 팥죽에 넣는 새알심보다는 제법 큰 크기여야 알맞다. 새알심에 팥소를 넣고 손바닥만 한 크기로 호떡을 빚는다.



스텐 프라이팬을 충분히 예열한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호떡을 얹어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준다. 겉이 바삭하게 구워지면서 찹쌀 특유의 느끼함이 감하고 고소함이 상승한다. 뜨거울 때 손에 쥐고 먹어야 제맛이다. 아이들은 붕어빵 맛이 나는 호떡이라며 연신 호호 불어댄다. 오래간만에 집안에 생기가 돈다.





여름 내내 우리 집 cd 플레이어에서는 윤종신의 '팥빙수'가 울려 퍼졌다.

'팥 넣고 푹 끓인다. 설탕은 은근한 불 서서히 졸인다 졸인다...(중략)...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왔다야...'

노래 가사에서 말하는 순서를 순순히 따르면 맛있는 팥빙수가 완성된다. 다만 우리는 '빙수용 위생 얼음''프루츠 칵테일' 대신 우유 얼음을 강판에 갈아 눈꽃얼음을 만들고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얹는다. 그 위에 콩가루와 통팥 조림을 듬뿍 올리면 유일무이 가정식 팥빙수가 완성된다.



눈꽃 얼음을 만드는 원리는 단순하나 팔에 힘이 무척 많이 들어간다. 제법 단단한 우유 얼음을 순전히 팔의 힘으로 곱게 갈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것을 팥빙수가 아닌 '팔빙수'라 불렀다. 힘을 얻고자 우리는 윤종신의 '팥빙수'를 틀어댔다. 종의 노동요였던 셈이다. 부부가 번갈아가며 눈꽃 얼음을 만드는 동안 네 식구 모두가 흥에 취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 마 녹지 마'를 신나게 외쳐댔다. 아이들은 강판 아래로 쏟아지는 눈꽃얼음에 환호했다.



팥빙수와 함께 수월하게 넘겨보낸 올여름을 지금에 와서 흐뭇하게 추억한다. 냉동실에 아직 지난 여름 얼려둔 우유 얼음이 남아 있다. 겨울이면 어떠랴, 조만간 힘차게 눈꽃얼음을 갈아야 할까 보다.









풋팥이 나오는 계절에는 찰밥을 자주 짓는다. 찰밥은 주식과 부식,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음식이 아닐까 싶다.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지만 찰밥 몇 숟갈이면 때때로 찾아오는 허기를 잠재울 수 있다.



시골 부모님께서 농사지은 풋밭을 꼬투리째 보내주시면 바로 손질해 냉동실에 넣어둔다. 그러고는 찰밥을 지을 때마다 아끼는 마음으로 풋밭을 꺼낸다. 수분을 촉촉이 머금은 상태라 묵은 팥처럼 미리 삶아둘 필요가 없다. 불려놓은 찹쌀 위에 수북이 올려 함께 밥을 지으면 그만이다.



전날 밤 찹쌀을 씻고, 밤과 대추를 미리 손질해두면 쉽게 찰밥을 지을 수 있다. 잘 보관해둔 풋팥을 양껏 넣는다. 압력솥 뚜껑을 여는 순간 훈짐이 얼굴로 확 끼쳐 오르면 불현듯 식구들에 대한 마음이 애틋해진다. 그 순간을 참 좋아한다.



각자의 밥그릇을 챙기지 않고 양푼 같은 커다란 볼에 찰밥을 산만큼 올린다. 점차 식구(食口)가 되어간다.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밖은 아직 어둑하다. 날짜를 헤아려보다가 곧 동지라는 걸 퍼뜩 깨달았다. 우리 집 새(얼리버드)들도 오래간만에 늦잠인지 작은 방이 고요하다. 한밤중 시계추 소리처럼 꿀렁꿀렁 팥죽 끓는 소리만 집안에 가득하다.



올 겨울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마치 동짓날의 기나긴 밤처럼. 어쩌겠나, 스스로 힘을 내어보는 수밖에. 잘 쑤어진 팥죽 한 그릇으로 의식을 치러가며 꿋꿋이 긴 밤을 견뎌내듯 말이다. 아직 할 말이 많은데 오늘을 넘기지 않고 이 글을 올릴 수 있을까? 기나긴 밤 동짓날이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참, 팥 삶은 김에 설탕 좀 넣어 팥빙수용 통팥 조림도 얼마간 남겨두었다.

이전 07화청국장에서 냄새가 난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