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톨렌을 나누며

아직 성탄을 기념하는 중입니다

by 서지현

올해 성탄은 팬데믹으로 인해 '강제로 고요한 밤'이었다지만,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밤이 꼭 그러했을 것이다. 숨죽인 듯 고요한 가운데 별들만이 신비를 속삭이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밤.



성탄은 단 하루의 기념일이나 흥에 겨운 이벤트가 아니라는 걸 이제와 깨닫는다.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그분의 사랑 앞에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면서 그분의 크신 사랑을 오래도록 묵상하는 것이 성탄의 참된 의미일 테니.



어린 시절, 서예 학원 선생님께서는 성탄이 되기 한참 전부터 통창 유리 난간에 성탄 트리를 세우곤 하셨다. 생 가문비나무 꼭대기에 커다란 별 장식을 달고, 가지마다 성탄 엽서를 걸어 만든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성탄 트리였다. 학원은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낮이고 밤이고 건물을 지날 때면 시원스러운 통창으로 들춰보이는 우뚝 선 성탄 트리에 마음이 밝아지곤 했다.



어김없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성탄이 지나고, 새해가 밝아도 성탄 트리는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왜 트리를 거두지 않으시는 걸까? 성탄 트리를 세운 수고가 아까워 오래 두시려는 거겠지', 그때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성탄 즈음엔 슈톨렌을 선물한다



나에게도 성탄을 맞는 나름의 의식이 있다. 성탄 즈음 지인들에게 슈톨렌을 선물한다. 아기 예수의 요람을 본떠 만들었다는 독일 전통 빵 슈톨렌, 일명 크리스마스 빵으로 불린다. 700년 전통을 가진 정통 발효빵으로 100일 동안 럼주에 절인 각종 견과와 베리류, 그리고 고급 향신료를 첨가하여 만든다. 빵을 굽는 사람들은 슈톨렌의 재료가 숙성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예수님의 나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던 것일까?



그렇게 오랜 정성을 들인 슈톨렌을 독일인은 가족과 함께 나누며 성탄을 기다렸다고 한다. 주말마다 가족들과 한 자리에 모여 얇게 슬라이스 한 슈톨렌을 한 조각씩 나누었다는 것, 그것으로 기다림의 크기를 키워갔음 직하다.



슈톨렌을 가족과 함께 나누며



성탄의 소란과 분주함이 잦아든 후에야 가족들과 슈톨렌을 나눈다. 슈톨렌을 한 조각 베어 문다. 묵직한 질감이다. 농익어 깊은 맛이 전신에 달콤하게 퍼진다. 빵을 뚫고 나오는 럼주에 절여진 건조 과일과 견과의 풍미가 향기롭다. 빵의 한가운데, 아몬드 가루와 설탕을 버무려 만들었다는 동그란 마지판(mazipan)이 달고 고소하다. 오래도록 입에 두고 음미하고 싶어 지는 그런 맛이다. 여운이 감돈다.



슈톨렌은 단순히 빵이라기보다는 정성 음식의 하나일 성싶다. 슈톨렌 한 뭉치를 구워내기까지 들이는 정성과 거쳐야 할 숱한 공정들을 생각할 때 보통의 빵들과는 구별 짓고 싶어 진다. 기다림과 간절함, 나눔 속 위로와 치유의 힘이 있는 음식이다.






식구들과 빵을 나누며 문득 한밤 중 양 떼를 지키다가 구주가 나신 소식을 전해 들었던 목자들을 떠올린다. 왜 하필 양 틈에 자던 목자들이었을까? 하긴 목자들이야말로 가장 쓸쓸하고 외로운 밤을 지새우던, 마음이 가난하고 위로가 절실했던 자들이 아니었던가. 이어 동방박사 세 사람을 생각한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그 값진 선물을 미리 준비했던 그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더불어 묵상한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시므온, 그리고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예수의 나심을 사모했던 여인 안나가 차례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탄생 앞에 어떠한 존재이며,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나는 여즉 성탄을 지내는 중이다. 성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성탄에 관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건 나의 성탄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다. 성탄의 여운이 남아있다. 내 유년 시절 서예 학원 선생님이 옳았다. 성탄절이 지났다고 당장 성탄 트리를 거둬서야 될 일인가. 한참을 세워두며 그분의 나심과 나와 그분과의 관계를 오래도록 묵상할 일이다.



내년엔 슈톨렌을 직접 구워볼 참이다. 아기 예수께 드릴 선물을 앞서 준비했던 동방 박사의 마음으로 오랜 시간 빵을 구우며 성탄을 기다리고, 맞이하며, 무엇보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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