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에서 집밥으로

아이야 미안해

by 서지현

미식의 세계를 알아가던 시기가 있었다. 새내기 교사 시절로, 부산의 한 사립학교에서였다. 사학 특유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선임 교사들은 따뜻했다. 서울에서 신참 교사가 내려왔다며 환대해 마지않았다. 선배 교사들은 기회 닿는 대로 부산의 이름난 식당들로 안내했다. 메뉴가 다채로웠고 음식에 사용된 재료의 반경이 확연히 넓었다. 학생 신분으로 사 먹던 밥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음식들이었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맛집'으로 속칭하기엔 석연찮은, 맛이 정갈하고 품격 있는 식당들이 많았다.



여담이지만,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다는 우리 집 한 남자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다. 피로연이나 뷔페식당 음식의 질을 가르는 기준은 회라고. 날것인지 냉동회인지, 신선도가 어떠한지 먹어보면 안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부산 식당의 음식 맛은 대체로 최상급이었다. 부산에서 미식을 경험한다는 것, 그것은 생래적으로 육지인인 나에게는 분명 복에 겨운 일이었다.




아무리 부산이 산해진미의 고장이다 한들 매일 잔치판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대부분의 끼니는 학교 식당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학교가 워낙 자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데다가 학교 기숙사에 기거하고 있던 터라 혼자서는 외출이 어렵기도 했다.(당시 학교 측은 부산에 연고가 없는 신입 교사들에게 기숙사 방을 제공하고 있었다.) 동료 교사들과 일부러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자연스레 하루 세 끼를 학교식당에서 해결해야 했다.



사실 학교 식당밥을 이야기하자면 내용이 조금 달라진다. 입맛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축임에도 식당 음식은 별로였다. 반찬 투정하는 아이처럼 단순히 맛이 있고, 없고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밥을 먹고 나면 금세 허기가 도는 게 아무래도 음식들이 영양면에서 부실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리라.)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당시의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당시 몸담았던 국제예술중학교 학생들은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성화고 진학을 목표로 대부분 기숙사에 기거했다. 이들에게는 학교 식당에서 먹는 세 끼 밥 외에는 다른 먹을거리가 없었다. 한창 자라나는 시기의 아이들에게 과연 그것으로 충분했을지,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미식 세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니 나의 경우가 아이들보다 나았다고 말해야 할까? 물론 그랬다. 적어도 아이가 들어서기 전까진. 태교 중에 음식 태교가 제일이라던데, 세 끼 밥을 위해 집 밖을 전전하는 엄마라니. 뱃속 아이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를 임신하고 한창 주말부부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 출산 즈음에 휴가를 받아 서울로 올라가기로 되어있었다. 희한하게도 아이를 가지면서부터는 부산의 별미도 말고 학교 식당 밥도 말고 딱 집밥이 고파졌다. 반찬 없이 누룽지를 끓이더라도 집에서 손수 밥을 지어먹고 싶었다. 아니, 꼭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일부러 기숙사를 나와 방 하나를 얻었다. 작은 규모의 주방이 따로 달린 원룸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몽글몽글하고 속이 포근한 계란찜이 먹고 싶었다. 엄마가 요리하시던 모습을 떠올려가며 계란물을 풀었다. 세상에, 계란찜이 그렇게 만들기 어려울 음식일 줄이야! 계란이 채 골고구 익기도 전에 밑은 타버리기 일쑤였다. 일단 밑이 눌기 시작하면 특유의 싼 내가 계란찜 전체에 스며들면서 대번에 입맛을 앗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엄마가 임신한 딸을 만나러 부산까지 내려오신 날, 엄마에게 계란찜을 주문했다. 엄마가 해준 계란찜은 소금 간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진한 멸치육수로 맛을 내고 새우젓으로 감칠맛을 더한 식이었다. 제법 간간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안심되는 맛. 땀을 뻘뻘 흘려가며 계란찜 뚝배기 그릇을 비워냈다. 엄마의 계란찜을 먹고 나서야 오랜 타향살이의 여독이 풀리는 것을 경험했다. 뱃속 아이에게도 조금 덜 미안하게 됐다.



그렇다. 내가 원했던 맛은 새롭고 참신하고 호화로운 맛이 아닌, 너무나 익숙해 이미 알고 있는 그런 맛이었던 것이다. 요리를 할 줄은 몰라도 찾아가야 할 맛, 제 주소를 알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물어물어 찾고 찾으면 그 맛이 나올 테지. 아직 희망은 있었다. 집 밖 미식 세계에서 오랜 투어와 방황을 마치고 손수 요리를 시작한 것은 딱 그 시점이었던 것 같다. 뭐랄까, 집밥으로의 회귀랄까.

매거진의 이전글누굴 위한 밥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