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해주는 김치볶음밥에 반해버렸다. 재료를 다루는 데서부터 그가 가진 자신감은 넘쳐흘렀다. 김치를 도마 위에 올려 쫑쫑 썰면 김치 맛을 제대로 낼 수 없다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선 밥공기에 알맞게 덜어낸 김치를 가위로 자자자근 한없이 다져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우직한지 땀방울이라도 또르르 흘러내릴까 보는 내가 다 긴장이 됐다.
또 하나의 맛의 비결은 계란을 다루는 방식에 있었다. 그는 계란을 두 번 풀었다. 한 번은 볶음밥에 섞을 용도로 두 개의 계란을 스크램블 했고 또 한 번은 다 된 볶음밥 위에 계란 한 알을 톡 터드려 전체적으로 막을 입혀주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볶음밥은 김치 맛이 도드라져 너무 자극적이다거나 짜지 않았다. 순하면서도 적당히 매콤한 중도의 맛, 매운맛에 약한 내 입에는 그야말로 맞춤이었다.
남자가 만들어준 김치볶음밥을 처음 먹은 날 여지없이 김치 국물을 마셔버리고 말았다. 아, 이 남자 이 정도 솜씨면 못하는 요리가 없겠구나. 그 길로 결혼까지의 길은 쉬웠다.
초등 아들의 셈여림표 기록 수첩
남자의 김치볶음밥은 오직 한 여자를 겨냥한 맞춤이기에 아이들 입에는 맞지 않았다. 그나마 첫째는 볶음밥 두 숟갈에 물 한 모금을 끼얹어가며 '맛있다 맛있다 매워도 맛있다' 했지만 어린 동생은 볶음밥 한 술을 떠넣고는 입을 헤 벌린 채 한동안 정지상태다. 그 맛있다는 아빠표 김치볶음밥을 눈앞에 두고서 더는 진도가 안 나가는게 본인도 하 답답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엄마표가 나설 차례. 양이 조금 부족하다 싶을 정도의 김치를 꼭 짜서 쫑쫑 썰고 양파를 김치 양 이상으로 넣어 볶는다. 약간 싱거울까 싶어 마늘장아찌 예닐곱 알을 빻아 간을 했다. 밥을 볶으며 아들이 뭐하나 힐끗 보니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그리느라 몰두해있다. 요즘 부쩍 피아노에 재미를 붙이더니 셈여림표에 빠져있나 보다.
"엄마 m 다음에 f가 나오는 셈여림표가 메조포르테인지 포르테시모인지 헷갈려."
"메조포르테지. ff가 포르테시모고."
"응 메조포르테가 조금 세게, 포르테시모가 아주 세게, 그리고..."
아들아, 오늘 김치볶음밥이 평소보다 몇 배나 맛있다고 말해줘서 엄마 기분이 무척 좋았어. 오늘 볶음밥 맛의 비결을 아니? 비밀 재료가 들어갔기 때문인데, 네가 평소 싫다며 손사레치던 마늘이거든. 실은 마늘장아찌를 빻아 간을 했지. 그 덕에 감칠맛이 난거야. 사실 우리 아들은 자기도 모르게 마늘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몰라.
네가 맛있게 김치볶음밥을 먹는 동안 엄마는 네 수첩을 힐끗 봤어. 그래, 네가 그린 셈여림포엔 메조포르테(mf)도 있고 포르테(f)도 있고 포르테시모(ff)도 있더라. 그런데 수첩 한편에 크레센도(cresc.)도 눈에 띄던걸.
크레센도(cresc.) 점점 세게. 엄만 네 입에 볶음밥이 너무 맵지 않도록 김치맛의 맵기를 서서히 조절해가고 있어. 안맵게, 조금 맵게, 그리고 점점 맵게 말이야. 맵기 조절에 실패한 날 너와 동생이 자꾸 물을 들이키면 그때만큼 안쓰럽고 미안할 때가 없더라.
어쩌면 음악이나 요리나 이렇게 닮은 꼴이 많을까. 화성을 잘 살린 연주곡이 사람의 가슴을 흔들어놓듯 사랑하는 이의 식성과 입맛에 맞게 조리된 음식 한 그릇은 힘이 세단다. 이게 엄마가 할 일인지 몰라. 낯선 재료는 친숙하게 끌어당겨주고 거친 재료는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거. 그러면서 네가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도록, 미식세계의 지평을 넓혀가도록 도와주는 거야.
아들! 오늘 김치볶음밥 맛있게 먹었으니까 캐리비안의 해적 피아노 연주 요청해도 될까? 셈여림표를 잘 살려서 '조금 비장하게' 말이야. 그럼 엄마 기분이 한결 좋아질 거 같아. 사랑해.
뒤늦게 밝히는 사실이지만 남자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김치볶음밥 말고 더는 없었다. 오호라, 내가 제대로 걸려들었구나!, 라고 말하기엔 그게 너무 기가 막힌 맛인 것이다. 얄미우면서도 귀엽고, 서운하면서도 고맙다. 한번씩 생색내며 만들어주는 내 입에 꼭 맞는 김치볶음밥, 그게 어디냐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요즘 피로물질이 쌓여만 가는데 오늘은 '아주 맵게 김치볶음밥'을 주문해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