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마네킹의 입은 옷이 밝고 해사하다. 그러나 봄을 너무 성급히 맞은 탓인가. 겨울 패딩을 다시 꺼내 입은 사람들이 자라같이 목을 움츠린 채 바쁘게 거리를 오간다.
만물 위로 봄기운이 살포시 내려와 앉을라 치면 '쌩'하고 찬바람이 인다. 별안간 봄의 온기를 낚아채가고 없다. 지난 겨울바람의 끝자락인 것이 분명하다. 시샘 많은 샛바람이 하냥 얄밉다.
장거리마다 마트 진열대마다 봄 푸성귀가 어깨를 겨루듯 쏟아져 나온다. 냉이를 사다 조물조물 무쳐 냉이 나물이나 해볼까, 달래를 한 줌 사다 달래장을 만들까, 차라리 쑥국을 끓이는 게 나을까. 살림 맡은 자의 마음은 한없이 들뜬다.
자태를 뽐내는 각양 봄나물에 자꾸만 눈길이 가닿으면서도 마음 한편은 남몰래 딴 곳에 가있다. 그건 다름 아닌 가을무. 마지막 하나 남은 걸 혹여 바람들 세라 신문지로 꽁꽁 싸매고 또 팩으로 야무지게 둘러 냉장고 한편에 고이 모셔두었었다. 정말이지 가을무 하나면 겨우내 찬거리 걱정이 없었다. 잘게 채 썰어 아삭한 식감 그대로 무생채로 내거나 쌀뜨물 약간에 굵은소금 몇 꼬집 넣어 살캉하게 무나물을 볶거나, 오징어 한 마리 썰어 넣고 시원하게 뭇국을 끓이거나. 밥차릴 기운마저 나지 않는 날엔 굵게 채 썬 무를 밥 위에 얹어 무밥을 지으면 그대로 만족스러운 한 끼가 되곤 했었지.
얼마 안 가 그리워질 가을무의 참맛. 마지막 남은 가을무를 꺼내 들었다. 극진히 아껴온 재료를 허투루 쓸 순 없기에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본다. 하나 남은 가을무를 영화롭게 할 메뉴는 바로 매콤 칼칼, 기름지고도 시원한 고등어 무조림.
아이 친구의 엄마이자 친언니 같이 다정한 이웃을 떠나보내는 날, 그녀를 집밥으로 초대했다. 가스불에서 지글지글 끓는 찌개를 냄비째 식탁으로 올린다. 고등어는 원래 맛있다. 기름지고 맛있다. 맞춤 맞게 살캉하게 익은 무조각을 젓가락에 힘을 주어 가른다. 한입 베어 물면 그것은 무조림이면서도 포근한 감자맛이 난다. 시원하고도 포근한 맛이 입안에 감기며 '키야'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마치 꾸준히 이어온 우리의 기특한 관계를 칭찬이라도 하듯이. 사람은 본시 유약하고 관계란 나약한 법인데 오랜 기간 한결같은 사이로 지내온 숨결같이 편안하고 다정한 우리.
섭섭한 마음일랑은 가을무의 뒤끝 없이 개운한 맛으로 달래 본다. 잘 가요. 이 맛이 생각날 때면 언제라도 들러요.
봄은 가만히 뒤에서 다가와 기다리고 섰는 이의 허리를 살포시 껴안는 애인이다. 난 그의 기척을 알면서도 애써 돌아보지 않는 도도한 여자다. 가을무가 이토록 맛있는 걸 보면 아직 설익은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