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오일링을 하며
집밥, 한 박자 쉬어가야 할 때
집밥 짓기를 과감히 내려놔야 할 날이 있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을 때, 대기질이 나쁠 때, 처리해야 할 잔반만으로 얼추 식탁이 꾸려질 때. 특히 몸 컨디션이 시원찮은 날 고집스럽게 주방 앞에 설 때면 크고 작은 사달이 나곤 했었다. 칼에 손을 베인다던지, 아끼던 그릇을 깨뜨린다던지. 간 조절에 실패한다던지, 냄비가 끓어 넘친다던지, 그것도 아니면 말짱한 밥을 홀랑 태워먹는다던지 말이다.
주방 살림을 한 박자 쉬어가는 날은 도마 오일링을 한다. 최소한의 살림살이를 원칙으로 한다지만 주방에 들인 원목 도마만은 이미 여러 개다. 어떤 도마는 자연스러운 나뭇결이 좋아서, 어떤 도마는 풍기는 향이 유독 향긋해서, 또 어떤 건 가로 세로의 너비가 넉넉해 맘 편히 칼질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여행 중 우연히 들른 공방에서 안 사고는 못 베길 도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도마 자체에 손잡이가 달린 것으로 그것은 조리 도구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훌륭한 플레이팅의 주인공이 될 터였다.
주방에 들일 때만큼은 저마다 각별한 사연과 이유를 품고 있었던 각양 도마들, 뒤틀림이나 이렇다 할 색배임 한 번 없이 언제나 한결같은 면만을 내보여온 든든한 살림 친구. 그러나 제대로 한 번 쓰다듬어주기는 커녕 쉴 새 없이 부려먹기만 한 건 아닌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작정하고 살림을 쉬는 날 도마에게로 마음이 기우는 이유일 것이다.
도마 오일링은 여유만으로도 될 일이다. 과정과 절차가 크게 어렵지 않다. 먼저 도마를 굵은소금으로 살살 문질러가며 미지근한 물로 닦은 후 완전히 건조시킨다. 가정에서는 식물성 기름인 들기름이나 올리브유를 많이들 사용하는 모양이지만 나의 경우는 애초에 도마용 미네랄 오일(BBO-11)을 구비해두고 있었다. 공방에서 원목 도마를 구매할 때 얼마간 얻어두었던 것이 무척이나 요긴하다.
작은 공기에 따라낸 오일을 천연수세미에 적셔가며 오일링을 한다. 기본적으로 나뭇결을 따라 문지르며 골고루 기름을 먹인다. 도마 자체가 가진 고유의 결이, 색깔이, 그리고 향기가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곱고 매끈했던가. 이처럼 반듯하고 구김이 없었던가. 한편 크고 작은 칼자국들이 영광의 훈장처럼 드러나 있다. 물기 마를 새 없는 주부 손의 거친 주름, 그 고단함의 흔적 같기도 하다.
오일을 한 겹 입은 도마들, 새 것 같진 않지만 새로운 느낌이 난다. 기름을 먹은 도마들이 선탠을 한 듯 한결 건강해 보인다. 나도 살림 걱정일랑은 잠시 접어두고 당장 봄햇살이나 맞으러 밖으로 나가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