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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말 Feb 28. 2021

활자가 주는 매력

쓰고 읽는 것보단


내 글씨체를 보면 그러한 모양새가 확연히 드러난다. 유선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졸면서 쓴 글씨 같은 흘림체로, 내 글씨를 본 지인들도 나를 놀렸을 정도이다. 나에게 쓰기는 그저 귀찮음의 존재였다. 기억하기 위한 약간의 보조 장치쯤으로. 나중에 보면 나도 못 알아볼 정도였으니.

나도 나의 글씨를 못 알아볼 때가 있다. 그래도 이건 양호한 편


책은 중고등학교 때 주로 소설을 즐겨 읽었으나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마저도 손을 놓기 시작했다. 당시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한답시고 전공과 취업에 필요하다는 서적들만 읽기 시작하더니, 책은 그저 나에게 넌덜머리 나는 존재가 되어갔다. 특히 자기계발서는 더한 불신이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은 아니기에 그 안에 나오는 해결책은 나에게 도움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 사람이니까 그 해결책이 가치 있었던 것이고 또한 결과론적인 스토리텔링이라 생각했다. 지금이 좋기 때문에 과거의 시련도 좋게 해석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활자로부터 멀어져 가면서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거의 내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떠한 물건, 우연한 장면 그리고 대화의 도움을 받아야만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스스로 떠올릴 재간이 없다는 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나를 잘 설명 못한다. 상대방이 나에 대한 질문을 할 때 중간중간 생각이 정지되는 느낌이 받았다. 심지어 자기소개서 단골 질문인 나의 장단점도 깔끔하고 명확하게 답을 못했다. 정말 잘 몰랐기 때문이다.


말하는 표현이 개운치 않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명쾌하게 말 못 하는 빈도가 많아졌다. 어떨 때는 의식하지 않고 말한다는 느낌도 받는다.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말에 군더더기가 많아지고, 업무에서도 말로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주변에 관심이 무뎌진다. 스쳐 지나간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어떨 땐 순간 시선을 사로잡는 것에 감탄하다가도 이내 사그라든다. 특히 일할 때 이러한 한계가 잘 드러났다. 마케터에게 필요한 자질이라 하면 다들 이것을 빼놓지 않는다. 바로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평소에 관찰하는 습관을 지니는 것. 나는 이게 약했다. 필요할 때만 그 감각을 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0에서 빠르게 끌어올리기란 쉽지 않다. 평소에 관찰력이 드릉드릉해야 필요할 때 빠르게 꺼내 먹을 수 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를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제일 미안했다

그동안 글로 남긴 나의 흔적은 없었다. 필요성을 못 느꼈다에 더 가까웠다. 기록을 하는 보통의 이유는 '기억하고 싶다'의 의미도 한몫한다. 지금 보니 나는 의식 없이 보내는 날들이 많았다. 떠밀려 사는 듯. 물론 그때그때 ‘주어진’ 일과 상황에 최선은 다했지만, 내가 ‘직접 만든’ 삶의 맥락은 별로 없었다. 하루하루 쳐내느라 버거웠고 그 치열함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잘 표현하지 못했다.


관점 또한 없었다. 단단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 삶뿐만 아니라 업에도 중요한 에너지원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최근에 깨달았다. 나는 무엇을 지향하며,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무엇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의 언행의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타인의 기준과 상황에 휩쓸려 선택과 판단을 했고, 그러니 결과에 대한 책임도 없었다. 촘촘히 복기와 회고할 시간 또한 없었다. 그렇게 나를 못 미더워한다.


그래서 오는 불안과 공허함은 나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활자를 내 곁에 두기

메모가 어느 정도 쌓이면 이자가 붙는다. 메모가 새끼를 친다. 특정 주제로 계속 메모하면 관련된 뉴런이 새로 만들어지고,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가 굵어진다. 이렇게 메모하는 주제에 맞게 뇌가 바뀐다. 해당 주제의 쓸 거리가 무시로 떠오르기 되는 것이다.

강원국, 나는 말하듯이 쓴다 168p


그래서 기록을 시작해본다. 지금 나에게는 노트 5권이 있다. 하나로 주제를 깊게 생각해 보는 디깅(Digging) 노트, 영감을 준 문장을 수집하는 노트, 일기, 애매하게 알고 있는 단어들을 모아 '사전적 정의'와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기록하는 단어 노트 그리고 필사 노트이다. 떠오르는 기억들을 수시로 기록하면서 붙잡으려 한다. 기록하다 보면 서로 다른 날의 기록들이 뭉치거나 연결되는 순간이 있다. 1+1=2가 아닌 3이 되어, 나만의 관점과 생각을 형성하는데 좋은 소스가 되어준다.


기록을 시작하니, 자연스레 글쓰기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 삶의 서사를 글로 남겨보는 시도를 하고 있다. 독립출판물에 '에세이 작가'로 참여해보고, 브런치 채널에서 '공감하는 작가' 되기에도 도전하고 있다. 내 글을 쓰다 보면 머릿속에만 존재했던 엉켜있는 생각들이 풀리고 정제됨을 느낀다. 쓰면서 깊게 생각해 볼 만한 질문과 키워드가 나오기도 한다. 브런치에는 나의 직무와 관련된 글을 주로 쓰고 있다. 마케터로서 '보내는' 일상과 마케터가 '보는' 일상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하나씩 퇴고할 때마다 그토록 갖추고 싶어 했던 업에 대한 전문성이 점점 뾰족해짐을 비로소 느낀다.


책을 매일매일 읽고 있다. 관점이 단단해지려면, 다양한 경우에 놓인 나를 상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택했다. 자기계발서에 대한 편견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모방하는 것이 나쁜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나의 관점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해보니 정말 맞는 말이네'

'이건 좀 너무 일반화한 것 같은데?'

'일부는 맞는 말이다. 근데 나라면 이건 이렇게 응용하면 더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다른 이의 삶과 생각을 읽으면서, 나를 대입해보고 나란 존재를 다듬어간다. 그 과정을 통해 관점들이 단단해져 간다. 



활자가 주는 원동력

지금은 더 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24p


어렸을 때 툭 던지듯 자주 했던 ‘그냥 하면 되지’라는 말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내뱉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 '해보는 것'에 대한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무게라는 것을 유심이 벗겨내면 실체가 없는 경우가 있다. 나의 허상으로 뭉쳐진 불안의 무게들이다. 그런 게 당신도 느껴졌다면 그땐 그냥 해볼 타이밍이다. 그렇게 작은 실천들은 파도의 파도를 타 더 큰 에너지로 나를 밀어주고 삶을 더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나를 믿게 되고 자신 있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기록되어온 활자들은 그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트랜지스터가 된다.


기록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게 되면, 주변을 더 두루두루 살피게 된다. 그렇게 기록하다 보면 평소에 당연하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생경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왜 컵의 손잡이가 왜 U자형이지? 처음부터 U자형이었던가?' 

'서점의 책 분류는 언제부터 이런 배열을 사용한 걸까?' 

'나는 왜 이 물건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생각에 웅장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사고가 확장되어감을 느낀다. 이게 영감 아닐까. 영감은 특별한 순간에 특별하게 떠오르는 것도 아닌, 평소의 나의 환경에서 매일매일 사소한 것을 위대하게 바라보고, 발견하는 과정임을 활자와 가까이하게 되면서 배우게 되었다.





 Thumbnail Photo by Brandon Lop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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