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다. 대학 동기들이다. 신입생 시절 같은 OT조로 만나 동아리 활동까지 함께 했던 인연이 있다. 비벼지고 엮이던 새끼줄 같은 인연이 시간을 거쳐 조금씩 풀어져 흩어진 것인지 이제는 서로 눈과 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산다. 종종 까슬하던 그 새끼줄의 실올들이 어디로 갔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기회로 만나게 되어 세월 속에 느슨해진 서로의 몸뚱이와 말투를 확인하면, 지금 각자가 직조하고 있는 삶 속에도 여전히 올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있다는 실감을 한다. 물 빠지고 실없는 농담으로 누구와 언제 또 이만큼 시시덕거릴 수 있을까.
몇 시간인가 차 마시고 수다를 떨고 난 뒤, 친구 한 명이 차를 가져오지 않아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삼십 분쯤 걸려 친구와 판교 집에 도착하니 답례로 엘피판을 골라가란다. 어쩐 일이냐 물으니 내년에 샌디에이고로 연수를 갈 예정이라 짐을 줄이는 중이라고 한다. 연수 마치고 귀국해서는 새 출발 하듯 집이든 가전이든 가구든 전부 새로 마련할 예정이라고. 엘피들이 주로 클래식이라니 내가 자주 듣는 장르가 아니긴 하지만 좋아하는 작곡가나 연주가가 없는 것은 아닌지라 정리장에 꽂힌 천 장은 되어 보이는 음반을 뒤지며 뭘 가져갈까 골라본다. 음반을 정리한 나무장이 집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오래되어 보인다. 정리장 구획마다 장르별로 메모를 적어 스카치테이프로 덧씌워 붙여 놓았다. 아니 이렇게까지 애써 정리한 걸 그냥 줘도 되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정리해 놓으셨던 거지. 내가 이걸 평생 다 듣기나 하겠냐”라고 한다. 친구는 “이사 온 뒤로는 애들이 집에서 너무 시끄러워서 도저히 음악을 들을 수가 없네”라고 말하며 턴테이블로 음악을 튼다. 음악 속에서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하며 닳아서 매끈하고 거무스름하게 변색된 정리장을 더듬어 음반 몇 장을 골라내고 “나 이거 도저히 하루 만에 다 못 고른다”라고 또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조수석에 두꺼운 엘피 더미를 싣고 바로 본가로 향했다. 아마도 아버지 서재에 설치해 두고 요즘 잘 듣지 않으시는 턴테이블이 있을 것이다. 본인을 위해서는 그다지 물건을 잘 사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이십여 년쯤 전에 당신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던 시절 모았던 엘피들을 다시 들어야겠다 하시며 앰프다 스피커다 전부 새로 구매하실 때 함께 들여온 물건이다. 내가 너무 즉흥적으로 간 건가. 선을 해체하고 장식장을 옮기고. 온 김에 앰프와 스피커까지 함께 가져가라며 창고에서 카트를 꺼내오라 하고. 온 김에 엘피도 조금씩 옮겨가라 하셔서 생각보다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아버지는 구조적인 사람이다. 헐겁고 느슨한 연결을 견디지 못한다. 방 안의 빈 공간에는 벽과 최소한으로 유효한 간격을 남기고 장식장을 놓아야 하고, 설령 지금 사용하는 스피커 보다 음질이 더 좋은 스피커가 있어도 남겨진 빈 공간에 음질 좋은 스피커의 사이즈가 맞아떨어진다면 그 스피커를 빈자리에 넣어 보관하는 식이다. 스스로 속해 있다 여기는 세계의 아귀가 맞아떨어진다는 인식에 안심하고, 그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불편은 구조 자체에 하자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참아낸다. 종종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인내심으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합리적, 동기적 판단을 마치면 그때에는 대대적인 변화를 시행하는 그런 주기를 거친다. 나는 좁은 공간 안에 너무 빽빽하게 배치된 구조들을 느슨하게 헤쳐 앰프와 턴테이블에 연결된 파워케이블, 그리고 RCA 선을 분리한다. 기기들을 옮겨 내오는 와중에 아버지로부터 명확하지 않은 개인적인 삶의 웅얼거림을 듣는다. 그리고 그 웅얼거림을 이해했다는 듯이 인사한다.
집에 돌아와 턴테이블과 앰프를 배치해 놓고 본다. 투명한 케이스 위에 앉은 드문드문한 먼지와 손자국. 아마 턴테이블 케이스에 쌓인 먼지를 새로운 먼지가 쌓이기 전에 손으로 닦아낸 자국일 것이다. 나를 포함해 주위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든 에너지를 통해 주변 세계를 스스로가 납득하거나 허락할 수 있는 구조로 바꾸어 오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의 세계는 정돈되고 의식화된 구조 속에서 수십 년에 걸쳐 확장되고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고 이제 와서는 오므라드는 중이다. 세밀한 작업을 시도할 때마다 아버지 본인이 작게 내뱉는 험한 탄식처럼 시력이 나빠져서, 청력이 떨어져서 일 수 있다. 손 닿는 곳에 놓아두었던 턴테이블 케이스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려던 시도와 그 온전치 못한 결과, 이러한 시도와 결과 사이를 점점 벌어지게 만드는 되먹임 기전의 오류, 쌓여가는 먼지가 아버지가 속해 있는 세계의 구조, 그 느슨해진 형태를 짐작케 한다. 새롭게 쌓인 먼지가 지금 아버지의 지문인 셈이다.
회전하는 검은 판은 삶이 끝나지 않는 왈츠라는 듯 노래한다. 우리가 음반 위에 올라선 바늘의 입장이라면 아마 만남과 헤어짐의 스쳐 지나감이 예정된 조화처럼 느껴질 것이다. 익숙한 검은 풍경에 대한 변주는 때로는 교향곡처럼 크게 울리며 꿈속의 현실처럼 선명하게 거실을 채운다. 우린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고 다시 만날 듯 스치고 지나가 점점 더 먼 풍경이 된다. 가늘게, 커다랗게, 때때로 잡음과 같이 회전하는 삶이 웅변하는 예정조화론. 가능성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우리에게 실제 허락된 회전의 반경은 점점 줄어들며 삶의 구조는 더 작은 영역만을 담당하게 된다. 종국에 노래는 멎고 우리는 음반 위를 벗어날 것이다. 태피스트리의 해진 끝 올처럼 말이다.
멈춘 음반을 턴테이블 위에서 꺼내 들어 홈이 파진 세계를 살펴본다. 이것이 하나의 세계라면, 손을 타고 이어지고 전해지는 음반들은 세계가 유전遺傳함 인가? 그렇다면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음반은 두 세계의 유전자가 섞임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건네받은 음반을 재생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계가 생긴다. 그 새로운 세계를 다시 보기 위해 음반을 턴테이블 위에 다시 올린다. 올려놓은 세계가 턴테이블 위에서 교반기의 반죽처럼 섞인다. 빚어지는 반죽에 섞인 비껴간 인연의 모습들이 구조를 청하듯 오르내린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삼켜야 할 의미들이다. 의미는 발효되어 다시 부풀어 오른다. 구조는 반죽의 골격이 되어 형태를 잡아 제 역할을 한다. 그리해서 삶에는 아직 대접받을 빵이 성찬聖餐처럼 배부르게 남게 된다. 아버지의 낮은 웅얼거림은 슬픔과 같은 웅얼거림에서 축도祝禱가 된다.
종종 음반 위에 내려선 바늘로서 잘못된 곡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 때가 있다. 나 자신이 아직 닦아내지 못한 손자국인 것처럼 말이다. 턴테이블 케이스 위의 먼지와 손자국을 닦아낼 수 있는 때는 언제쯤일까. 의미의 성찬을 앞에 두고 순결해져야 한다면 그 일은 분명히 누구보다도 내가 이어서 해야만 할 일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