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 밤 일정을 이래저래 소화하다 종종 거실에 지갑이 없다는 걸 깨닫는 경우가 잦다. 차 안에 놔두고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도 그렇다. 차 안에 있겠지 싶은 마음이지만 어딘가 흘렸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설마 완전히 잃어버렸을까, 어차피 내일 또 몰고 나갈 차이니까 출근길에 확인하면 될 일이지, 내일 아침 차 안에 없으면 어차피 지금도 찾을 도리 없이 잃어버린 경우니까 지금 초조해 봐야 소용도 없어.
그런 마음도 있다. 하지만 불안이란 고정된 삶의 조건이 아닌 걸 알고 있다. 합리적인 판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 각오 없이 마실 나갔다 비를 맞닥뜨린 상황 같은 것인지라 결국은 비를 피해 주차장에 내려가 차 문을 열고 컵 홀더에 고이 놓여 있는 지갑을 확인해서 집어 들고 올라온다. 그러면 그렇지.
정신이 없는 거다. 정신이 없다는 것은 몸이 있는 곳에 정신이 없다는 이야기이겠지. 자꾸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생각하고 있다. 빚을 갚는 것처럼. 애도해야 하는 날들에 보상하기 위해 사는 듯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여기가 이곳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듯.
많은 역할을 맡고 있고 선한 일도 꽤 많이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제한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좁디좁은 계界 안에서의 조화를 위한 자구책임을 안다. 그렇기에 내 의식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경계를 분명히 안다. 경계의 안에 쳇바퀴 돌 듯 자전하며 삶을 제한된 구획 안으로 끌어들인다. 삶을 이 테두리 안으로 계속 끌어들이는 하루하루의 구심력은 무엇인가.
어째서 육체는 원심분리기 속에 욱여넣어진 듯 삶의 중력에 포획되어 끝없이 가라앉고 정신은 경계의 밖으로 날아갈 듯 휘둘리고 부유하는가. 관성이 범속한 삶에 부여된 부동의 조건이라는 착각이 이러한 분리를 야기하는 것인가. 생존과 사명이라는 얇은 경계에 작용하는 끊임없는 관성력은 이원론적인 자아에 작용하는 멀미를 체감케 하는 근본 힘으로 작동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가. 아직도 이 관계성의 유비를 명확히 하기 어려운 멀미를 겪고 있다.
멀미의 풍경이 시선을 어지럽힌다. 불투명한 클로쉬처럼 세계를 덮어씌운 가림막이 하나 있다면. 가리어진 상식의 그늘 안에서 모든 세계가 어둡고 검게 오므라들어 윤곽 하나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지닌 한계와 고독이 뭉치고 얽혀 오직 단 하나의 세계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응축된 고독의 덩어리 안에서는 어떤 새로운 반응이 일어나게 될까.
감히 내가 그 세계를 예측한다면, 응축된 고독 속에 자리한 조화로움의 세계에는 화폐가 없을 것이다. 실질 적으로 건네주는 것도, 줄 것도, 받는 것도, 받을 것도 없이 하는 역할 놀이의 경제만이 존재할 것이다. 뭉치고 부둥켜 안은 응축된 결합 안에는 어차피 소진되어야 하는 서로의 시간 만을 줄줄이 가판 위에 늘어놓고 건네고 건네어 받을 따름이다. 화폐로 환산되거나 소진되지 않는 가치 덕분에 서로의 시간을 끝없이 주고받다 보면 고독의 덩어리는 무한한 시간의 순환과 밀도로 환원되어 새로운 원리의 핵이 될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길게 늘어진 사건의 지평선 너머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미래의 기억들을 향해 실질적 거래로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의식만을 쏘아 보내고 몸은 영원히 다가가기만 하게 되는 셈이다. 영원히 가까워지지 못하지만 예정되어 있는, 예정되어 있을 영육靈肉의 결속을 위해.
응축된 세계, 그 환상의 주변에서 나는 까마귀가 된다. 알지 못하는 미래를 덮는 까만 깃털과 같이 거친 울음 목소리가 이 백지 위를 천성인 것처럼 제 역할을 하며 덮어 나간다. ‘우리가 진다. 우리가 진다.’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