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일] 1세기 지어진 로마 성벽 앞 서민의 일상과 유희
1~4세기 지어진 로마 방어성벽 앞 골목 공터에 야외 식당이 의자와 파라솔로 어설프게 만들어진 야외 식당이 좌판을 갈았다. 골목길에서 나온 시민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며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왁자지껄한다. 식당 앞에는 통기타 3개와 색소폰을 갖춘 4인조 밴드가 스페인어로 경쾌한 노래를 부른다. 그 앞을 지나가던 여성이 음악에 맞춰 춤추며 나아가다 밴드 앞에 놓인 수금함에에 유로화 동전을 몇개 떨군다. 식당 출입구 앞에는 술집 주인 같은 주민 두세명이 늑대라 해도 믿을 수 있는 엄청 험악해보이는 개들을 얼르고 있다. 어린이 하나는 개들과 몸싸움 하며 어울린다. 평일 이른 저녁시간에 흥은 최고조에 이른다. 성벽 일부는 주거지로 개조되어 아파트처럼 창문이 나 있었다. 2000년 전 지어진 건축물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고 오락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바르셀로나 고딕과 보른 지구다. 바르셀로나가 시작된 원심이라고 해야 하나. 바르셀로나는 도심 중앙에 위치한 카탈루냐광장을 경계로 북쪽 신시가지와 남쪽 구시가지로 나뉜다. 신시가지는 명품숍이 밀집한 그라시아 거리를 중심으로 유명 관광지와 고급 주택가가 정사각형 도너츠 모양으로 밀집해 조성되어 있다. 드론 촬영하면 정사각형 고리 모양의 건물이 레고블룩처럼 차곡차곡 정렬되어 있다. 반면 카딸루냐 남쪽 람블라 거리와 라에이따나 거리 사이와 그 양옆에 형성된 라발, 고딕, 보른 지구는 무질서하게 엉켜 미로 같은 복잡한 골목권을 만든다. 이곳은 서울로 말하면 종로 같다고 할까.
바르셀로나 여행기를 볼 때마다 고딕, 라발, 보른 지구에 가지말라는 권고가 나온다. 반면 가우디 작품이 밀집한 그라시아 거리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구엘공원은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 코스로 강추한다. 가우디 작품 대다수는 도시 중심에 위치한 카탈루냐 광장 북쪽에 조성된 신시가지에 있다. 라발 지구에 있는 구엘 저택은 예외지만. 그러다보니 한국 관광객 다수는 신시가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 일부 여행객은 신가지만 보고 돌아간다. 서울에 와서 압구정동과 청담동만 들르고 종로와 광화문은 건너 뛰는 것과 같다.
구시가지에는 바르셀로나 토박이나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 밤늦게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면 길을 잃어버리고 자칫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들어섰다가 휴대전화나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관광객이라면 고딕, 보른, 라발을 꼭 방문할 것을 권하고 싶다. 지갑이나 휴대전화는 주머니 안쪽에 넣고 다니고 인적이 드문 후미진 골목 안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별탈없이 구경하고 다닐 수 있다. 굳이 바르셀로나에서 잊지못할 짜릿한 이벤트를 만들고 싶다면 휴대전화와 지갑을 손에 들고 인적이 드문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겠다면 어쩔 수 없고.
고딕과 보른 지구는 바르셀로나의 속살 같은 곳이다. 다양한 인종의 토박이들이 엉켜 살아가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색있는 도시 문화를 만들고 있다. 검은 피부에 근육질 몸을 자랑하는 북아프리카 흑인들이 람블라 거리를 지나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이 가슴을 절반가량 내놓고 코걸이를 걸고 고딕 지구 골목을 무리지어 다닌다. 무어인과 기독교인 혼혈 같은 이국적 여성들이 엉덩이 살을 비어져나오는 초미니 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팔, 어깨, 발목, 종아리, 등에 갖가지 모양의 문신을 그려 넣었다. 키가 185cm가 넘을 북유럽인의 후에들은 깔끔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쿨하게 걸어간다. 바르셀로나 해안인 바르셀로네타 해변에는 전 세계에서 샘플로 뽑아온 듯한 다양한 인종들이 해수욕, 배구, 서핑을 즐기거나 모래사장에 누워 일광욕이 한창이다. 마음의 여유가 주는 일상의 유희와 오락이 하나도 같지 않은 개성에 맞춰 만화경처럼 빛난다.
람블라거리에서 라발지구로 접어들어가는 초입에 자리한 보케리아 시장에서 문어 다리 하나와 왕새우 4개를 주문해 맥주 2병을 점심 대신 먹고 마셨다. 다시 람블라 거리를 가로질러 고딕지구로 들어가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둘러보고 그 뒤에 자리한 로마성벽(건축연도 1세기, 그니깐 예수님과 탄생연도가 비슷하다)을 따라 미로 같은 고딕지구룰 해메고 다녔다.
그러다 길을 잃어버렸다.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현지 통신사 오렌지 사가 시스템 고장으로 그 회사 유심 카드를 넣은 휴대전화는 몽땅 인터넷이 단절되었다. 그 탓에 길도 모르고 2~3시간 해메고 다녔다. 그 안에 바르셀로나의 속살을 볼 수 있었다. 그라시아 거리, 즉 신시가지가 깔끔하고 세련된 새침데기 같다면 고딕과 보른은 힙합 스웩이 넘치는 히피처럼 다가왔다. 하도 걷다보니 다리도 아프고 허기져 골목 구석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어눌하기 짝이 없는 스페인어로 닭한마리 시켜 맥주와 함께 해치웠다.
아침에 나와 저녁 7시까지 걸어다닌데다 술까지 들어가니 피곤이 몰려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스페인 그라다나에서 투어가이드로 일하는 오우영씨가 룸메이트로 들어와 있었다. 카미노 순레 끝난 뒤 포르투갈 거쳐 남부 안달루시아로 들어갈 예정이라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우영씨는 가이드 생활 15년차다. 안달루시아 여행 관련 유튜버로도 유명하다. 그와 한창 안달루시아 여행에 대해 열띤 대화를 주고 받은 뒤 곯아 떨어졌다. 참, 우영씨는 모로토 여행을 적극 말린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일단 건너가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단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5성급 호텔에 숙박해도 지붕에서 뭐가 떨어질 지 모르고 물을 마시다 탈이 나기 일쑤다. 그러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과거와 달리 스페인이 받아주지 않는단다. 코로나 탓이란다. 굳이 사하라 사막을 보고 싶으면 마드리드로 올라가 비행기를 타고 사하라사막에 인접한 마라케시로 바로 가란다. 어찌해야 하나. 목숨 걸고 지브룰터를 건너야 하나. 아니면 코로나 시국이 끝난 뒤 안전할 때 가야 하나. 고민 거리가 하나 생겼다.
내일은 몬세라트에 간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디자인할 때 영감을 받았다는 돌산이란다. 유서 깊은 카톨릭 수도원이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기차로 1시간이면 간다.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카사 빈센스를 다 돌아보다보니 조금 질린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반복해서 먹다 보면 물리지 않나. 그럼에도 구엘 저택과 카스 바트요는 다녀오기 바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반드시 가야하고. 카사 밀라나 카사 빈센스를 겉모양만 보면 된다.
구엘 공원은 크게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생경스럽고 신기한 곳이지만 사진이 나온 게 전부다. 공원 정상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우뚝 솟아 오른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는 게 일품이다. 그 정도다. 가우디 작품들은 투어로 하루에 몰아보고 시간 나면 고딕과 보른에 가서 맥주도 마시고 해산물도 즐기고 길도 잃어버리고 헤매길 권유한다. 그래도 시간 나면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가서 해수욕을 즐기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