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30분 일어났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오전 8시 생장 알베르게를 출발했다. 나폴레옹 루트를 따라 피레네 산맥을 넘을거다. 정복자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기위해 넘던 길이다. 로마시대에는 로마 황제들이 로마병을 이끌고 이 길을 넘었고 나폴레옹이 이 길을 통해 이베리아로 처들어갔다. 정치적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행태를 싫어하는지라 정복 루트를 걷는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 길에 들어섰다.
초입에 들어서자 가파른 언덕길이 이어졌다. 5분 지나자 순례객 하나가 대뜸 말을 걸었다. 다른 순레객 2명과 함께 걸으며 주변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친구였다. "메고 있는 배낭밖에 짐이 없냐? 무게가 얼마나 되냐? 배낭에 무엇이 들어있냐?" 무거운 배낭을 메고 먼 길을 걷는데 얼마나 힘든지 아는지라 짐을 최소화했다. 노트북 포함해 4.5kg으로 짐을 줄였다. 침낭 760g, 패닝 300g, 발가락 양말 3개, 속옷 1벌씩, 티셔츠 2개, 우비 1벌, 슬리퍼만 담고 다른건 걸으면서 해결하려 했다. 샴푸 한통 가져갔지만 그걸로 빨래하고 샤워하느라 거의 다 썼다. 그러니 3.5리터 가방 안에 짐을 다 넣을 수 있었다.
영국인 제임스, 미국인 피터, 라트비아인 아더, 그리고 한국인 리는 카미노에서 친구가 되었다.
그게 신기한가보다. 순례객들마다 적게는 7kg 많게는 15kg까지 배낭을 메고 다닌다. 가지고 다닐 짐이 많나 보다. 생장 알베르게에서 만난 에바는 14kg 배낭을 가리키며 "내 죄의 무게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 만나며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그녀가 카미노를 걸으면서 덜 필요한 물건을 버리면서 자기 죄의 무게를 줄일 수 있기를 소원한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얼굴에 해바라기 같은 웃음을 담고 만나는 사람마다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짧게는 5분 길게는 1시간 수다를 떨어야 하는 순박하고 착한 사람이다.
피레네를 넘던 순레객 하나가 산 아래 풍경에 빠져 있다.
다시 내게 배낭 무게를 물어봤던 친구에게로 돌아가자. 얼굴도 몸도 둥글둥글한 이 순례객은 영국 요크셔에서온 제임스다. 유쾌한 친구다. 이 친구가 있으면 늘 주변에 시끌벅적하다. 옆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온 피터가 함께 걷고 있다. 1미터 떨어져 옆에는 라트비아에서 온 아더라는 청년이 따라왔다. 아더는 27세다. 라트비아어로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 내가 앞으로 영국 왕이었던 킹 아더를 본따 킹이라고 부르겠다고 하니 피터와 제임스가 빵터졌다. 내 영어 유머가 국제적으로 먹히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제임스와 피터는 아더를 보좌하는 원탁의 기사들을 자처했다. 나는 뭘할까하다 마법사 멀룬을 자처했다. 이런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나누면서 서울, 캘리포니아, 요크셔, 라트비아에서 온 순례객들은 친구가 되었다.
피레네를 함께 넘은 동지 브라이언과 피레네 정상에서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서 평소 체력에 따라 앞서가거나 뒤처지는 이들이 생겼다. 하루 평균 2시간 이상 꾸준히 운동한 덕에 나는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뒤에 두고 앞서 치고 올라갔다. 한참 가다보니 캐나다인을 만났다. 멋진 신사였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태어나 미국 미시간에서 사는 브라이언은 세쌍둥이 아버지다. 아들은 시애틀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딸 둘은 밴쿠에서 산다. 그는 왼쪽 다리 쥐가 나 고생하면서도 처방약을 바르며 내 걷는 속도를 따라왔다. 예순한살 중년 남성이 아주 빠르게 걷는 나를 뒤쳐지지 않고 따라와 놀랐다. 피레네를 넘는 내내 브라이언과 함께 움직였다. 브라이언은 한참 가다 쉬는 시간마다 쏘세지, 아몬드, 초콜렛 같은 먹을거리를 내놨다. 음식을 따로 준비하지 않은 터라 이 친구의 음식 제공이 너무 감사했다.
한참 가파른 길을 오르니 푸드트럭이 보였다. 피레네 정상 주변에서 음식을 파는 유일한 푸드 트럭이었다. 바나나, 오렌지 주스, 커피, 물을 파는 작은 행상이지만 힘겹게 피레네를 넘는 순례객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당분 보충처다. 푸드 트럭에 다가가자 하루 전 출발한 에바가 나를 발견하고 카메라와 배낭을 버리고 달려와 나를 안았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고작 하루 쌓은 우정이지만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만나니 반가움이 터져 나왔나보다. 눈물나게 행복했다. 누군가 이리 반갑게 나를 맞이한 이가 있었나 싶다. 에바는 자기 남편과 영상 통화하면서 나를 친구로 소개했다. 남편은 나를 알고 있었다. 에바가 나에 대해 말했나보다.
피레네 정상에서 본 풍경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100미터 걷을 때마다 돌아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했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정상적으로 마친 이라면 피레네 산맥을 건너는 건 식은죽 먹기다. 피레네가 힘들다면 자꾸만 정상을 감춘다는 거다. 하늘이 보이길래 이제 정상이구나 싶으면 길이 다른 고지로 꺾어져 다시 오르막길이 나온다. 피레네는 이처럼 오르막길을 숨기고 있다가 순례객이 이제 정상이구나 안심할 때 지니고 있던 오르막길을 드러내며 순례객들을 골탕먹인다. 그러니 정상에 세워진 구조물과 벤치를 만나기 전에는 피레네에 속지 말기 바란다. 정상에서 다음 숙소가 있는 론세스바에스가 멀리 내려다보인다. 그 다음에는 아주 가파른 내리막길이 6km 이어진다.
가파른 길을 요크셔에서 온 제임스, 미시건에서 사는 캐나다인 브라이언과 내려오는 뒤에서 아주 서투른 영어로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말하는 여성 순례객의 목소리를 들었다. 뒤 돌아보니 피레네 산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 이름은 페닐라로 덴마크인다. 26세로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다. 마지막 학기를 맞아 방학 기간 홀로 카미노를 걷고 있다. 그녀는 아주 빨리 걸었다. 웬만한 순례객들은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자기 속도에 맞춰 걷고 있는 동양인이 신기했나보다. 자기를 소개하면서 나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다. 그것도 서투른 영어로. 너무 이뻤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낯선 이방인에게 보이는 관심은 유쾌했다. 그리 함께 걷다가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고 공교롭게도 내 맞은편 침대를 썼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한 멤버. 왼쪽 첫번째가 에바, 오른쪽 첫번째가 페닐라다.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날 저녁 페닐라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알베르게가 마련한 만찬에 페넬라와 에바, 그리고 영국 브리스톨에서 온 커플, 아주 조용한 캐나다 여성이 한 테이블에 모여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동석자들에게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렇게 2시간가량 떠들고 친구가 되었다. 카미노에는 행복한 이들이 넘쳐난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 노르웨이인 크누트가 카미노를 10번씩이나 걷는지 이해하겠다. 축복 같은 여행이다. 지난 15년을 돌이켜보건대 이만큼 행복한 적이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